[미술품 경매의 정치학] 박정희 휘호는 왜 경매시장서 사라졌나

입력 2013-04-27 04:02 수정 2013-04-27 04:19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는 미술품 경매에서 단골 품목이었다. 국내 최대 미술품 경매사인 서울옥션이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경매에 부쳐 낙찰시킨 박 전 대통령 휘호는 38점이다. 경매 때마다 한두 점씩 나와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 후발 경매사인 K옥션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박 전 대통령의 휘호 12점을 팔았다. 2010년 4점이 낙찰되는 등 경매 때마다 인기를 끌었다.

박 전 대통령 휘호 최고가는 2007년 3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1억1000만원에 낙찰된 글씨다. 1967년 1월 17일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라고 종이에 먹으로 썼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박 전 대통령의 휘호가 경매에 나오지 않고 있다. 서울옥션의 경우 지난해 2월 항아리에 쓴 ‘有備無患(유비무환)’이 800만원에 낙찰된 이후 지금까지 한 점도 출품되지 않았다. K옥션 역시 지난해 9월 ‘同志同念(동지동념)’이 1000만원에 낙찰된 이후 지금까지 매물이 뚝 끊겼다. 경매에 내놓는 위탁자가 없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휘호가 자취를 감춘 것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부터다. 박 대통령이 선친의 휘호 등 유품이 경매에 출품되는 것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소장자들이 출품을 꺼려 한다는 것이다. 한 경매사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의 휘호가 나오면 박근혜 대통령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소장자들도 그런 점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09년 2550만원에 낙찰된 ‘國論統一 總力安保(국론통일 총력안보)’의 진위 논란도 출품을 주저하게 했다는 분석이다. 이 작품은 민족중흥회가 박 전 대통령 휘호를 중심으로 1989년 발행한 ‘위대한 생애’에 수록된 것으로, 출품작과 겹쳐보면 서명 부분이 서로 어긋난다. 동일한 작품이라면 두 개가 똑같이 겹쳐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가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소장자가 휘호를 경매에 내놓았다가 위작 시비에 휘말린다면 패가망신하기 때문에 선뜻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상’이라는 서적을 통해 미술품 진위 문제를 제기한 이동천 감정학 박사는 “박 전 대통령의 휘호가 인기를 끌면서 시중에 가짜가 다수 나오기도 했다”며 “소장자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박 전 대통령 휘호를 섣불리 경매에 내놓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서예가 손재형(1903~1981)의 지도를 수년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대통령의 글씨는 강건한 필체로 ‘사령관체’라고 불린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이래 18년 재임기간에 ‘광화문’ 등 전국 각지에 친필 1200여점을 남겼다. 매주 1점씩 쉬지 않고 글씨를 쓴 셈이다. ‘자조정신’ ‘근면검소’ ‘개척과 전진’ ‘민주언론’ 등의 구호를 즐겨 썼다. 한자보다는 한글 휘호가 더 비싸다.

박 전 대통령의 휘호 가운데 돈이 될 만한 것은 거의 경매에 나왔기 때문에 관망세라는 해석도 있다. 시간이 지나고 박근혜 대통령 집권 말기나 임기 이후에는 다시 경매에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경매사 관계자는 “역대 대통령 휘호가 집권 중 경매에 부쳐진 적은 한 번도 없다”며 “박근혜 대통령 집권 중에는 박 전 대통령 휘호 경매가 주춤할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 휘호 대부분은 공공기관이나 지인에게 하사한 것으로 경매에 내놓으면 소장자 신분이 노출될 우려도 있기 때문에 출품을 주저하고 있다. 그동안 경매 출품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공공기관장이나 언론사주 등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휘호를 받았던 사람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매에 내놓는 이유는 대부분 경제적 사정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휘호를 구입하는 컬렉터는 박 전 대통령의 통치 철학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다. 2004년 ‘개척과 전진’을 6300만원에 구입한 사람은 50대 사업가로 박 전 대통령 작품의 단골 고객이라고 한다. 또 2006년 ‘근면 성실 인내’를 2500만원에 낙찰 받은 컬렉터는 한 기업 대표로,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