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에 쏟아지는 별별 탄원서] 반성형·눈물형·협박형… 판사는 ‘진심’을 본다

입력 2013-04-27 03:59


법원 재판부에는 수많은 탄원서와 반성문, 진정서들이 접수된다. 눈물나는 탄원서도 있고, 재판기록만 채우는 의미 없는 탄원서도 부지기수다. 판사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진정서도 있다. 성폭행 사건, 정치인 비리, 재벌 비리, 일반 형사사건 등 사건 성격에 따라 내용도 천차만별이다. 서울의 한 형사재판부 A부장판사는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진정서에 난감해하고 있다. 이들의 진정서는 보통 ‘피고인이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며, 무조건 실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분노에 찬 피해자들은 “피고인을 풀어주면, 죽어버리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법대에 앉은 판사들도 함부로 지나치기 어려운 내용이다. 특히 지난해 성폭행을 당한 60대 여성이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본인이 입원해 있던 병원의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이 여성은 피고인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하늘에서 지켜보겠다’는 유서를 남겼다. A부장판사는 “피해자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재판은 공정하고 엄격하게 진행돼야 하는데, 이런 극단적인 경우에는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말했다. 무시하기도 곤란하고, 의견을 들어주기도 곤란한 상황인 셈이다.

‘대필 반성문’도 많이 접수된다. 서울중앙지법 B판사는 구속된 채 재판을 받던 한 피고인으로부터 모두 세 차례 반성문을 받았다. 하지만 반성문의 글씨체가 매번 달랐다. B판사가 재판 기일에 심리를 마친 뒤 “반성문 글씨체가 다 다르네”라고 혼잣말을 하자, 피고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피고인은 구치소 내에서 가장 반성문을 잘 쓴다고 소문난 동료 수감자 3명에게 반성문 작성을 부탁했고, 반성문 필체가 전부 달랐던 것이다. B판사는 “구치소 안에서는 반성문을 잘 쓰는 수감자들은 동료들로부터 대접을 잘 받는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재벌이나 기업인 비리 사건에 대한 재판에는 지역단체나 시민단체들의 탄원서가 자주 접수된다. 이들 단체는 과거 재벌 피고인의 회사로부터 기부를 받거나 도움을 받았던 단체들이다. 최근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경우 항소심 재판이 시작된 직후 지방의 시민단체에서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한화그룹은 과거 해당 지역의 문화제 행사에 물품 등을 협찬하는 등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사 직원들의 탄원서는 ‘단골손님’이다. ‘회장님이 없어서 계열사들이 너무 힘들다’는 내용이다. 한 번에 수백 장씩 들어오는 경우도 일반적이다. 재판부의 반응은 호의적이지는 않다. 지방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C변호사는 “재판기록을 두껍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했다.

정치인 사건의 경우 동료 의원들이 탄원서를 제출하곤 한다. ‘곁에서 의정생활을 함께하며 지켜본 피고인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탄원서 뒤에는 탄원서에 동의하는 여러 정치인들의 서명이 붙어 있다. 하지만 효과는 크지 않아 보인다. 수도권의 D부장판사는 “뻔한 내용들이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건은 더 많은 탄원서가 들어온다. 자신을 학대하던 어머니를 살해한 후 방치했던 E군 재판에서는 국회의원들이 탄원서를 제출했다.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던 지난해 신의진 의원 등 새누리당 의원 15명은 “E군의 행위가 패륜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끔찍한 범행 이면에는 오랫동안 지속된 심각한 아동 학대가 있었다”며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했다. 사후매수죄로 재판을 받던 곽노현 전 교육감 사건에서는 많은 교수와 학자들이 재판의 헌법적 쟁점에 대한 의견을 담은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다양한 탄원서와 진정서, 반성문들이 효과가 있을까. 대부분 판사들은 “내용에 따라 다르다”고 답했다. 판에 박힌 탄원서들은 대부분 훑어보고 지나친다고 한다. 핵심은 ‘진정성’이다. 판사들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탄원서나 진정서는 유심히 살펴본다. 탄원서나 진정서의 내용이 피고인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재판장이 검사와 변호인의 동의를 구한 뒤 법정에서 사실관계를 따지는 증거로 쓰이기도 한다. 진심을 담은 반성문은 피고인에 대한 양형을 결정할 때 주요하게 고려된다.

어이없는 탄원서도 적지 않다.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는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 사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수감자 F씨는 1심 재판 때부터 이 전 의원의 사건과 자신의 사건을 함께 진행해 달라는 신청서를 넣고 있다. 물론 F씨는 이 전 의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G판사는 과거 본인이 맡았던 한 형사사건의 피고인으로부터 ‘개들이 다 굶어죽는다. 제발 풀어 달라’는 탄원서를 받은 적이 있다. 개를 사육하던 피고인은 “다른 가족이 없기 때문에 개밥을 챙겨줄 사람이 없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G판사는 “개가 굶어죽는다는데 상황이 딱했다. 그렇다고 풀어줄 수는 없고, 난감했다”고 회상했다.

판사들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건 어린이들의 탄원서다. 지방법원 부장판사 출신 H변호사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우리 아빠 제발 풀어주세요’라며 쓴 탄원서를 읽다 보면 판사도 마음이 짠해질 수밖에 없다”며 “틀린 맞춤법만큼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