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사랑에 질린다면…
입력 2013-04-26 17:33
파울로 코엘료가 쓴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문학동네·2001)에 나오는 내용이다. ‘에두아르’라는 이름의 유고슬라비아 청년이 있었다. 청년의 아버지는 외교관이었다. 아버지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아들을 자기처럼 외교관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어느 날 아들은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다. 그를 돌보던 간호사는 선물 받은 거라면서 성자(聖者)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책 한 권을 그에게 건네준다. 그 책은 그의 자아 속에 숨겨져 있던 미지의 열망을 일깨워 준다. 그는 거룩한 자들이 보았던 환상, 중세에 자주 그려졌던 ‘천국의 환영’ 같은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기원했다.
사랑하되, 질리도록
퇴원한 뒤 그는 그림을 시작했다. 그의 방은 천국에 관한 온갖 환상적인 그림으로 가득 채워져 갔다. 부모는 두려웠다.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이 두렵다기보다, 훌륭한 외교관으로 키우고자 하는 그들의 희망이 실패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성적이 형편없이 떨어지면서 부모의 초조감은 더해 갔다. 아이는 학교 성적은 좋지 않아도 미술 성적은 최고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외교관인 아버지는 노련하고 집요하게 그를 설득했다. 우선 공부를 하면 나중에 대도시에서 그림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가 가난뱅이 화가가 된다면 엄마가 그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죄책감에 평생 시달릴 거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갈등이 계속되던 어느 날, 결국 아들은 그림을 포기하겠노라고 선언했고 부모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다음 날, 아들의 방은 찢겨진 그림으로 온통 엉망이 됐고, 아들은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놀란 엄마는 아들을 안으며 엄마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고 호소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때 이후론 더 이상 대화에 응할 수 없었다. 부모의 ‘사랑에 질려’ 그 사랑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가능했던 유일한 탈출구는 자신의 열망을 스스로 꺾어야 하는 그런 현실의 무대를 떠나 자기만의 세계 속에 갇히는 것, 소위 정신분열증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정신병동에 들어간다. 이 이야기를 쓴 코엘료 자신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에두아르’의 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경험이 아닐까 추측한다.
부모의 ‘사랑에 질려버렸다’는 말, 아마도 천재 작가의 자전적 고백일 그 말을 나는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본다. 행여나 나 역시 아이들을 ‘사랑에 질려버리게’ 만드는 아빠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나의 첫째 딸은 초등학생 때부터 늘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해 왔다. 딸의 원대한 포부 앞에서 나는 그 길이 배고프고 힘든 길이거나, 아예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없는 물거품 같은 것이라고 겁주기까지 했다. 또 ‘너 정도의 재능이면 좀 더 안전하고 편한 길이 있다’고 딸을 설득하곤 했다. 물론 그가 순순히 설득당한 적은 없다. 얼마 안 있으면 대학에 진학할 나이인데도 여전히 그의 방은 요정과 상상 속의 인물로 버무려진 동화의 세계다. 유고슬라비아인(人) 아빠와 한국인 아빠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데도 어찌 이렇게도 비슷했던 걸까. 그런데 작년부터 나와 아내는 입장을 바꾸어 딸의 꿈을 꿈으로 놓아주기로 했다. 한 인간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면 꿈이라도 마음껏 꾸도록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내 딸이 서래마을의 어떤 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한 엄마가 수학시험에서 20점 만점에 14점을 받았다고 아이를 때린 다음 아파트 문밖에 맨발로 쫓아내어 한동안 세워두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14점은 그 반의 최고 점수였다. 아이의 엄마는 딸의 점수가 자랑스러웠던지 그 이야기를 내 아내에게 해 주었고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누가 그 엄마에게 돌을 던지랴. 자식이 질리도록 사랑 아닌 사랑으로 옥죄는 것이 우리나라 부모의 자화상이 아니던가. 나는 하나님께 회개한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긴 생명이라고 입술로 늘 고백해왔건만 그건 가식어린 거짓이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이의 미래를 열어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틀로 아이의 삶을 찍어내길 바랐기 때문이다.
사랑하되, 질리지 않도록
사막 교부들은 사랑하되 질리도록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타인을 구속하지도 않았고, 은혜를 핑계로 사람들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사막 교부들은 하나님 말씀조차도 감히 함부로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사람치고 그 가르침에 넘어지지 않는 자가 드문 까닭이다. 아랫사람이 질문해 와야 비로소 입을 열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형제들이 한 말씀 청하자 안토니오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의로움을 확신하지 말라.”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옳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사막 교부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늘 의심했고, 자신이 틀린 게 아닐까 항상 조심스러웠다. 그들의 사랑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늘 스스로를 살폈던 자신에 대한 의심 덕택일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의심한다. 고로 나는 (하나님 앞에) 존재한다.” 나는 오늘도 사막의 이런 슬로건을 생각하며 걷는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