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18년 전 감기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암이 됐어요”

입력 2013-04-25 20:44


김종기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이사장, ‘학폭’에 아들 잃은 아픔 담은 책 펴내

“화구(火口)가 열렸고, 대현이가 나왔다. 분쇄사의 손을 거친 대현이는 작은 오동나무 함에 담겨 내 품에 안겼다. 함은 뜨거웠고, 나는 오열했다. 그 뜨거움과 서러움이 불에 덴 자국처럼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아버지의 이름으로’ 33쪽).”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들의 육신을 화장한 뒤 아버지에게 남은 참혹한 기억이다. 아버지는 최근 그 기억들을 모조리 꺼내 책으로 엮었다. 김종기(66·사진)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 이사장 얘기다. 그의 아들 대현군은 1995년 6월 투신자살했다. 당시 16세, 고교로 진학한 지 3개월 됐었다. 이후 김 이사장은 청예단을 설립하고 학교폭력 추방운동을 시작했다. 삼성전자 홍콩 지점장을 거쳐 신원그룹 기조실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재단 일이 바빠지자 급기야 직장까지 그만두고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온몸을 던졌다.

24일 서울 방배동 청예단 사무실에서 김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세상에 이런 고통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참고 썼다. 아들의 죽음을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고 했다.

책에는 아들을 잃은 부모의 아픔이 절절히 배어나온다. 학교폭력이 어떻게 단란했던 가정을 파괴하고 가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소상하게 기술돼 있다. 학교폭력을 감추려는 학교와 냉소적인 관료들, 여론이 들끓으면 “근절하겠다”고 시늉만 하는 정치권을 변화시키려는 한 개인의 투쟁기도 담겨 있다.

책을 접한 그의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는 “아이 엄마는 아직 책장을 넘기지 못하더라. 앞부분을 조금 넘기다가 눈물 때문에 다시 덮어버리곤 한다”고 말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 이사장은 아들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청예단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후 청예단은 우리나라에서 학교폭력에 관한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UN 경제사회이사회로부터 특별지위를 받을 만큼 국제적 평가도 받았지만 김 이사장에게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입으로 꺼내는 건 여전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못지않게 안타까운 것은 학교폭력에 희생당한 학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 이사장은 “대현이가 죽었을 때 학교폭력은 감기수준이었는데 이제 암이 돼 버렸다”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학교폭력이라는 암을 극복하려면 교사와 교육관료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먼저 학교와 교직사회의 변화다. 그는 “지금 최대 걸림돌은 학교다. 최근 학교폭력을 보고도 모른 척한다는 한 현직 교사의 고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면서 “제자들이 죽어나가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부끄러워야 하는데 오히려 보신주의가 팽배해 있다”고 질타했다. 이어 “교사들의 잡무가 많다고들 하는데 사기업체의 업무 강도와 비교해보면 변명거리가 안 된다. OECD 회원국 중 교사 처우는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은 교육관료들의 변화다.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대책이 쏟아졌지만 애들은 계속 죽어나간다. 그 이유는 공무원들이 자리를 자주 옮기느라 단 한 개의 정책도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권이 달라지거나 장관이 바뀐다고 왜 일선 실무자까지 다 바꿔버리나. 담당 공무원이 1년도 못 넘기고 수시로 바뀌는데 어떤 정책이 남아나겠는가”라고 질타했다. 그는 “교육계 전반의 진정성 있는 자성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그것이 학교폭력 근절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