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3부)] 파독 광부·간호사 삶 영화로 만드는 2세 김소연·미리암 로시우스씨

입력 2013-04-25 19:18 수정 2013-04-25 22:54


김소연(41) 미리암 로시우스(42)씨. 이들은 파독 광부, 간호사의 2세다.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 학교에 다니고, 독일 친구와 어울렸고, 독일 방송국에 취직해 독일인과 결혼했다. 어릴 적엔 한국말을 강요하는 부모와 대화를 꺼렸다. 빚이 쌓여가는데도 한국 가족에 꼬박꼬박 돈을 부치는 아버지가 늘 원망스러웠다. 광부였던 아버지는 왜 그래야 했는지 딸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부모님의 나라와 문화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국을 오고 가며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인 정서에 자리 잡은 ‘한(恨)’과 ‘정(情)’을 느끼기 시작했다. 50년 전 독일로 건너와 가족을 위해 젊음을 바친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삶을 생각했다. 이들의 얘기가 잊혀지는 게 두려워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영화 제작을 위해 한국에온 김씨와 로시우스씨를 지난 19일 오후 여의도에서 만났다.

◇‘한(恨)’과 ‘정(情)’=지난 10일 입국해 26일 독일로 돌아가는 이들은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로시우스씨는 어머니 방영숙씨의 고향인 충남 전의와 친척들이 살고 있는 대전, 안양, 강릉 등을 다녀왔다. 로시우스씨와 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역관이었던 백영훈(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씨 등을 만나 광부, 간호사 파독 과정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연세대학교에서 ‘독일 이민사’에 대한 강의도 했다. 김씨는 이번 한국 방문이 다섯 번째이고, 로시우스씨는 열 번째다. 아버지 고(故) 김동해씨가 광부, 어머니 강순애씨가 간호사였던 김씨는 서툴지만 한국말을 한다. 하지만 한국인 간호사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로시우스씨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

-한국에 오면 어떤 느낌이 드나.

“(김씨) 12살 때는 참 이상했다. 부모님 가족이라고 하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20년이 흐른 후 남편(김씨는 ‘신랑’이라는 표현을 썼다)과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는 달랐다. 작은아버지, 삼촌, 이모들을 만났고 함께 금강산도 여행했다. 독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작은아버지와 헤어지며 많이 울었다. 그리고 ‘왜 한국에 다시 오기까지 20년이나 걸렸을까’라고 내 자신에게 물었다. 사실 어릴 적 한국에 대한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100%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독일에서 자랐다. 항상 여동생에게 언니가 양보해야 된다는 식의 한국식 문화가 싫었고 불편했다. 학교에서는 독일 사람이지만 집에서는 한국 사람이 돼야 했다. 사실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을 강요당했다. 아버지는 ‘나와 말하고 싶으면 한국말로 하라’고 했다. 그래서 10대 때는 아빠와 거의 대화를 안 했다. 특히 우리도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데 왜 한국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24세 때 독일에 와 할머니, 고모, 작은아버지 등 한국 가족과 독일 가족을 위해 평생 헌신해야만 했다.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2010년 암으로 돌아가셨다.”

“(로시우스씨) 1988년 처음 한국에 왔다. 그전까지는 항공료 등 비용 문제로 오기 힘들었다. 1988년에 온 것은 어머니의 큰오빠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2006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한국에 왔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한국 얘기와 한국 동화를 많이 듣고 컸다. 그래서인지 한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1988년 처음 왔을 때 많이 놀랐다. 일종의 문화적 쇼크였다. 나는 한국말도 못하고 참 무례했지만 한국 사람들은 정말 따뜻하게 맞아줬다. 한국 특유의 ‘정’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6년 후 두 번째 왔을 때는 한국이 정말 빨리 변하는 것에 놀랐다.”

-‘정’이나 ‘한’ 같은 감정을 이해하나.

“(김씨) 독일에선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지난해 한국 방문했을 때 ‘디스커버리 채널’ 동아시아 담당 에디터인 인도인 비크람(Vikram)씨를 만났는데 우리가 다큐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의 ‘정’과 ‘한’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충고를 해줬다. 그 후 많이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이 한이 정말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어머니 아버지는 인생을 즐길 시간이 부족했다. 낮에 일하는 것도 모자라 밤 근무까지 하며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었다. 그들은 사실 돈 쓰는 법을 몰랐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지만 항상 돈이 모자랐다. 집을 사면서 빚이늘었어도 항상 한국에 돈을 보내는 것은 빠뜨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고창이 고향인 아버지는 말수가 매우 적은 분이었다.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독일에 도착해서 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에게 졸라서 겨우 들었다. 아버지 세대 때는 ‘남자는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나 보다. 어머니도 장남과 결혼해서 참 힘들었을 것이다. 한이 많으셨던 분들이었다. 그리고 나도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정이라는 감정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요즘 느낀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로시우스씨) 이번에 친척분들과 얘기를 하면서 어머니가 1966년 독일에 처음 와서 어떻게 살았는지, 근무환경이 어땠는지 알게 됐다. 사실 그 전까지는 한 번도 얘기를 안 해주셨다. 얘기를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영화=김씨와 로시우스씨는 50년 동안 자아실현에 앞서 한국 가족과 독일 가족을 위해 헌신한 재독동포 1세들의 삶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한다. 이들의 작업은 이제 시작단계다. 김씨는 우선 독일 중부 아헨지방 땅속 깊은 곳에서 광산근로자로서 고생한 아버지의 삶을, 로시우스씨는 1966년 간호사로 베를린으로 온 어머니의 숨결이 같이했던 생가와 학교, 근무지 등 한국과 독일의 공간을 재조명하고 있다.

-영화 제목 ‘Mr. Kim and Sister Lotus(김씨와 연꽃 누이)’의 의미는.

“(로시우스씨) 독일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한다. 김씨가 많고 비슷하게 생겨서인지 한국 광부들을 ‘김씨’라고들 많이 불렀다고 한다. 연꽃은 한국 간호사들 애칭이었다. 일 잘하고 예뻐서 그렇게 불렀나보다. 우리 어머니는 한국무용을 하는 모임에 나가시는데 모임 이름이 ‘Lotus(연꽃)’이다.”

-다큐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김씨) 독일에서 한국 광부나 간호사가 어떻게 독일에 오게 됐는지 역사적인 배경을 아는 사람은 몇 명뿐이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더 모른다. 그런데 파독 1세들이 돌아가시기 시작했고 이들이 없어지면 잊혀질까 걱정됐다. 그래서 38세 때쯤 언젠가 이들의 얘기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시우스씨와 프로젝트를 하게 됐다. 또 파독 50주년에 맞춰 상영을 해야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로시우스씨) 함께 베를린의 같은 방송국에서 기자로 근무하다 만났다. 사실 우리는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부모님이 한국 사람이라 얘기하다 보니 통하는 게 많았다. 간호사였던 어머니들은 1945년생 동갑으로 서로 잘 알지는 못했지만 함께 아는 친구도 있다.”

-현재 파독 1세들의 삶은 어떤가.

“(김씨) 한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예전에는 광부들의 경우 한국에 돌아가면 직장이 없어서 돌아가지 못했다. 실제로 한국에 돌아갔다가 직장이 없고, 자녀들이 한국말을 잘 못하고 적응을 못해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1세들이 한국을 떠나고 한참 뒤까지도 한국은 어려웠다. 하지만 이후 한국은 많이 발전했고, 이제 한국은 그들이 떠나왔을 때의 한국이 아니다. 더 이상 그들에게 과거의 고향이나 그들 생각 속의 한국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한국에 오면 많은 괴리감을 느끼고, 문화적 충격을 겪는지도 모르겠다. 1세들이 독일에 올 때는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왔다. 그리고 그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소원대로 큰돈을 벌어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시는 분들은 소수다. 지금 대부분 적은 연금으로 근근이 살고 계신다.”

-영화 제작의 어려움은.

“(로시우스씨) 우리는 독일 방송국들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 몇몇 방송사들이 흥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방송국과 영화 제작에 대해 얘기했지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한국 사람들의 독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는 것이다. (웃음) 완전히 바뀌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작업에 관심 가져주신 분들이 많다.”

김씨와 로시우스씨는 동포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이 영화 제작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소망했다. 영화 예고편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