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日 초능력자 대결… 승자는 누구?

입력 2013-04-25 17:27


신경진 장편소설 ‘중화의 꽃’

신경진(44)은 다채로운 이력의 작가다. 한국외국어대 헝가리어과를 나와 1998∼2002년 캐나다 레스브리지대학, 맥매스터대학에서 각각 영문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했다. 동창 가운데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수십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는 귀국했고 소설가를 직업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 안에 녹아 있는 공학도와 인문학도의 감성을 십분 발휘하는 특이한 체질의 작가인 것이다.

데뷔작 ‘슬롯’으로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을 거머쥔 그의 세 번째 장편 ‘중화의 꽃’(문이당)은 초능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난 22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그는 “언젠가 잡지에서 중국에 초능력부대가 있다는 기사를 읽은 게 이 작품을 쓴 동기”라며 “초능력에 대해 쓰면서도 초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나 자신을 설득하며 쓴 소설”이라고 말했다.

소설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중화의 꽃’을 둘러싼 한·중·일 3국의 치열한 첩보전을 다룬 장르문학이지만 군데군데 박혀 있는 진지한 내레이션으로 인해 한층 빛을 발한다. 예컨대 부모가 화염 속에서 사망한 사건의 충격으로 괴이한 말을 쏟아내며 정신을 잃은 중국 초능력 부대원 쉬징레이에 대한 진술이 그것. “쉬징레이를 지도했던 교관의 말이 기억났다. ‘모든 정보는 추상적이다. 메타포가 들어 있지 않은 정보란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다. 사실이라고 믿는 구체적이고 계량화된 정보 대부분은 사라지고, 오직 인간의 은유적이고 불분명한 꿈의 기록만이 보존될 것이다.’”(18쪽)

이러한 진술은 작가 스스로 초능력을 믿지 않는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한 장치일 수 있겠다. 바꿔 말하면 이런 진술로 인해 이 소설은 초능력을 믿지 않는 독자들이 가장 거부감 없이 초능력에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일지도 모른다.

줄거리는 손에 땀을 쥘 만큼 흥미롭다. 중국 초능력 부대원들은 한국으로 잠입, 북한 출신 고위급 망명자 김평남을 심장마비를 가장해 암살한다. 때마침 한국의 박물관에서는 신비의 돌 ‘울트라 라이트 19’가 사라진다. 일련의 사건에 의혹을 품은 한국 국정원 요원이 수사에 나서고, 일본의 초능력자들까지 가세하면서 사건은 더욱 긴박감 있게 전개된다. 하지만 작가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서두르거나 흥분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폭력성이 동북아 정치 변동이라는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현재 남북한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지역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한국과 일본은 독도 문제로, 중국과 일본은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 국가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실을 한·중·일 초능력자들의 대결 국면으로 상징화했지요.”

실제로 소설은 최근 경제발전을 이룩한 중국의 팽창과 아베 신조 집권 이후 더욱 노골화되고 있는 일본의 극우성향, 북한의 핵무기 개발 등 동북아 정세와 맞물려 있다.

“현 동북아 정세는 소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지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지역의 평화주의자는 모두 사라지고 정치적 신념에 매몰된 극단주의자들만 득세하는 형국입니다. 진짜 초능력자란 염력을 사용하고, 미래를 보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인류를 파멸로 이끌 군대를 움직일 수 있고, 자신의 의지대로 강력한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일지도 모릅니다. 제 생각엔 한국인들이 중국의 국가 정체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겉으론 온건한 지도자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 쪽에서 보면 패권주의자요, 중국 입장에서는 민족주의자가 아닙니까.”

어떤 측면에서 그가 빼든 초능력이라는 보검은 컴퓨터 공학의 필수 조건인 알고리즘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 프로그램을 작성하기 전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일련의 논리적 절차가 그것. 동북아 정세를 알고리즘의 관점으로 풀어나가려고 할 때 ‘초능력’이라는 하나의 가상적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2권짜리 두툼한 소설이지만 3∼4시간 만에 독파한 독자가 있을 정도로 흡입력을 갖춘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