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주의에 상처받은 노동을 회복하라

입력 2013-04-25 17:42 수정 2013-04-25 19:24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스베냐 플라스푈러/로도스

다음 달 1일은 근로자의 날. 열심히 일한 당신에게 쉼이 허락된 날이다. 그날 내게 노동은 어떤 의미인가 성찰해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마침 당신의 노동은 안녕하냐고 묻는 책이 나왔다. 독일의 대중적 여성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가 쓴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저자는 성과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워커홀릭이 되어간다고 본다. 일중독은 운동중독과 함께 국가로부터 장려되기까지 한다. 개인적 욕망도 일중독을 강화한다. 막스 베버가 얘기했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는 근면이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 자리를 ‘일을 통해 인정받고 싶은 끝없는 욕망’이 꿰찼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침대로까지 가져가 잠자리에서까지 메일을 체크하고, 휴가를 가서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며, 불안한 여가시간보다 차라리 야근이 마음 편한 우리 시대 노동자의 모습을 저자는 일중독자로 정의한다. 그러면서 이걸 일에 대한 ‘강박적인 사랑’이라고 부른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과 일에 대한 중독, 그 차이는 무엇일까. 구분법은 의외로 명쾌한데, 저자는 이를 사랑에 비유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과 강박적인 헌신은 차이가 있다. 즉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연인은 사랑의 대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그러니까 자신은 자동차 바퀴처럼 교체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뚜렷이 느낀다는 것이다. 상대의 사랑이 불안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상대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해고 혹은 명예퇴직의 위협에 놓인 우리의 노동이 가지는 조건이 아닐까.

생존이 절박한 사회에서는 고통이나 상처조차도 쓸데없는 것이 됐다. 내 몸이 아파야 일이건, 운동이건 그것이 과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통증은 존재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제 통증은 알약 하나 삼켜 제거해야 할 정도로 거추장스러운 것이 됐다. 그리하여 워커홀릭의 사회로 무한질주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 때로는 탈진할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말이다.

고리를 끊을 수는 없는가. 저자는 능동적인 삶 대신 수동적인 삶을, 행동 대신 ‘놓아두기’를 권한다. 무위, 즉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커다란 포기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미 내가 어떤 행동을 결정한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수많은 행동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재독 철학자로 ‘피로사회’ 저자인 한병철 교수(베를린예술대학)의 말을 인용한다. ‘분주함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분주함은 기존의 것을 재상산하고 가속화하기 때문이다. 창조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쉬지 않고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산책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권태에 몸을 맡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 아닌가. 경우에 따라서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스스로가 허용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노동조건에 더욱 우울해질 수 있는 당신에게 저자가 던지는 마지막 말은 위로가 될 법하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라. 물에 나를 맡기면 몸이 절로 물에 뜨는 수영의 원리를 삶에 가져가보라.” 장혜경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