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의승 (10) 귀국후 중령 예편… 해군 등에 獨 디젤엔진 공급
입력 2013-04-25 17:29
월남 파병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진해 해군 기지에서 근무하다 서울로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72년에 1년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해군기지로 유학을 갔다. 미 해군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다. 나와 인도네시아 군인 등 2명의 외국인이 미군과 함께 공부했다. 70년대 초반 군인이 미국 유학을 가는 것은 큰 혜택이었다.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 공부를 했던 것이 얼마나 내게 유익한 일이 됐던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미국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부러웠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려 목적지로 가기까지 10차선이 넘는 길을 달렸다. 나를 태워준 미군이 “너희 나라에도 이런 길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생각해보니 세종로 정도밖에 없는 것 같았다. 미군들의 생활도 우리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웠다. 나는 ‘우리나라는 언제 이렇게 되나’고 생각하며 한탄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70년대 초반이었는데 30년 만에 우리나라도 미국과 견줘 전혀 뒤처지지 않는 생활환경이 됐다. 우리 민족은 정말 대단한 민족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이룬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샌프란시스코에서 1년간 머물면서도 나는 최대한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했다. 동시에 장소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나의 전심을 쏟았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일관된 나의 모토였다.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그분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실 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소령에서 중령이 될 때까지 ‘FMS(foreign military sales)’의 한국 측 담당관으로 일했다. 여전히 미군의 군사 원조가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7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지원이 삭감됐다. 점차 우리 돈으로 군대를 운영해야 했다. 나는 외국서 장비나 부품을 도입하는 일에 관여하다보니 점차 무역에 눈을 뜨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독일의 세계적 엔진 업체인 ‘MTU’와 접촉이 많았다. 중령에 진급할 즈음 MTU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당시 우리나라는 급속하게 산업화되는 시기였고 거기에 따른 인력이 필요했다. 외항선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해군 출신들이 그 외항선의 선장과 기관장이 되었다. 외국의 선주들이 파격적 고임을 주면서 스카우트를 했다. 해군 내에서 “이러다 우리가 국제 선원양성소가 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전역 붐이 일어 동기생들은 대부분 제대했다. 나도 고민하다 MTU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는 파란만장했던 군 생활을 마친 것이다. 그 시절을 회상해보니 전혀 후회함이 없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신 행복한 기간이었다.
나는 77년에 MTU 한국 지사장을 맡았다. 일반 기업에 오니 일단 수입이 많았다. 지사장을 맡자마자 군에서보다 4배나 더 많은 연봉을 받았다. 나는 해군과 각종 해양 업체에 MTU의 디젤 엔진을 공급했다. 시점이 잘 맞았는지, 하나님이 나를 축복의 그릇으로 쓰셨는지, 아무튼 사업은 눈부시게 성장해갔다. MTU 본사가 보기에 엄청난 실적을 올렸다. 83년부터는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MTU 본사는 회사 역사상 기록적인 실적을 올린 내게 깊은 호감을 갖고 있었다. 어느날 MTU 관계자가 “미스터 정이 그 탁월한 실력으로 독일 잠수함을 한국에 팔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제의했다. 사실 MTU는 잠수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저 나를 좋게 보고 내게 기회를 주려 했던 것이다.
정리=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