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전당? 복사의 전당!
입력 2013-04-24 18:16
저작권보호센터 단속 현장 동행 취재
“이게 다 불법 복제물이네요? 사업자등록증 좀 보여주시죠.”
“아유, 학생들이 해 달라고 해서 해준 건데…한 번만 봐주세요.”
지난 22일 서울 상도동 숭실대학교 앞 A복사점. 예고 없이 현장점검을 나온 단속반이 복사점 한 구석에 쌓여 있던 제본 더미를 들춰내자, 이제 막 제본을 마친 듯한 복사물 10여 권이 쏟아져 나왔다. 단속반이 찾아낸 복사물은 ‘○○대학교 출판부’라는 출판사명과 저자명이 뚜렷이 찍힌 이 학교 경영학 과목 강의 교재. 타 대학에서 발행한 단행본의 수백 페이지를 저자의 허락 없이 복사해 스프링으로 철한 불법 복제물이었다. 이날 본보 기자와 함께 단속에 나선 저작권보호센터 오프라인팀 단속반 3명이 가게 구석구석에서 불법 복제물을 찾아내자 “우리 가게에선 그런 거 취급 안 한다”며 발뺌하던 복사점 주인은 “제발 한 번만 봐 달라”고 이내 태도를 바꿨다.
앞선 17일 고시학원과 복사점들이 즐비한 서울 신림동 녹두거리 주변에서도 학생들이 맡긴 불법 복제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한중관계사’ 책 전체를 복사해 제본철로 만들었다는 서울대 재학생 B씨는 “책을 구입하는 것보다 이렇게 복사한 뒤 제본해 사용하는 것이 값도 싸고 편리하다”며 “불법인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당장 시험 날짜가 다가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중간고사 시즌을 맞아 대학가 주변 복사점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불법 복사가 성행 중이다. 지난 17일과 22일 찾은 서울대·연세대·이화여대·중앙대·숭실대의 교내외 복사점에서는 저자의 허락 없이 불법으로 복사·제본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불법 복사와 제본의 대상이 되는 책들은 주로 고가의 강의 교재들. 최근에는 아이패드나 노트북을 이용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PDF파일을 이용한 ‘스마트한’ 불법복사까지 등장하고 있다. 수입 원서 등 일부 출판물과 함께 판매되고 있는 PDF파일을 스캔한 뒤 스캔본을 다시 복사해 묶어 교재처럼 쓰는 방식이다.
단속에 함께 나선 이관희(53) 반장은 “일부 로스쿨의 경우 헌법·형법·민법 등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강의되는 모든 교재의 PDF파일을 수십만원을 들여 제본해 아예 ‘한 질’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한 지방대 로스쿨은 재학생 50여명이 이런 불법 복제본을 사용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법을 준수해야 할 사람들이 저작권법을 위반하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저작권 인식이 부족하기는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짜깁기’한 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불법배포를 권장하고 있다. 숭실대 앞 C복사점에서 적발된 사회복지학과 수업교재 역시 관련 과목 단행본 여러 권과 논문, PPT 파일들을 짜깁기한 불법 복제본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수가 지정해놓은 교재인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저작권단체협의회 산하 저작권보호센터에 따르면 지난 2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전국 7개 권역 대학가 2000여개의 복사업소들을 단속한 결과 총 251건, 7854점의 불법 복제물이 적발됐다. 이 반장은 “최근 복사점 업주들끼리 카카오톡 메신저 등을 통해 단속 정보를 공유하거나 따로 창고를 만들어 불법 복제본을 몰래 보관하기도 한다”며 단속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글·사진=김수현 기자 siemp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