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들의 학교폭력 모의재판 “왕따·신상털기 폐해 실감”
입력 2013-04-24 18:06 수정 2013-04-24 01:15
고교생 이모군은 ‘왕따’였다. 같은 반 친구들은 재수 없다며 매일 놀려댔다. 김모군은 자신도 왕따를 당할까봐 교실에서 이군에게 욕을 하며 발로 차 넘어뜨렸다. 이를 지켜보던 최모군이 폭행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최군은 이군이 더 이상 당하지 않게 도와주려고 동영상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다.
폭행 동영상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유포됐고 가해자 김군은 다니던 학원과 교회에서까지 비난의 표적이 됐다. ‘신상털기’에 나선 네티즌들이 김군 아버지의 회사 홈페이지에도 동영상을 퍼 날라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뒀다. 김군은 심각한 우울증세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김군은 학교 졸업 후 동영상을 올린 최군을 정보통신망법 위반(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학교폭력을 고발하려 했던 최군의 행동은 유죄일까, 무죄일까.
24일 서울동부지방법원 형사 15호 법정에서 이 사건의 재판이 열렸다. 판사·검사·변호사·배심원은 모두 대원여고 1·2학년 학생들. 서울동부지법이 법의 날(25일)을 맞아 개최한 청소년 모의 국민참여재판에서 학생들은 열띤 공방을 벌였다. 이 사건은 학생들이 학교폭력과 인터넷 신상털기의 위법성을 직접 따져보도록 판사들이 실제 사건을 변형해 만들어낸 시나리오다.
정식 재판처럼 개정선언, 모두절차, 증거조사를 마친 뒤 검사의 피고인 심문이 시작됐다.
“피고인은 그 동영상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릴 경우 인터넷 전체로 유포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검사)
“학내 문제여서 학교 안에서 해결되리라 생각했고 누군가 외부로 유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피고인)
변호사는 “폭행 동영상을 일반 웹사이트가 아닌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기 때문에 공공연히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방의 목적도 없어서 명예훼손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검사는 “김군은 동영상 때문에 수많은 네티즌에게 비난을 받아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정신적·물질적 손해가 심각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반박했다.
피고인 최후 변론 후 배심원 토의가 이어졌다. “동영상을 올린 학교 홈페이지는 이미 사건을 알고 있는 학생들과 교사만 볼 수 있는 사이트여서 공공연히 드러낼 목적이 없었다”는 쪽과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퍼 나르는 건 일상화된 일이므로 공공연히 드러냈다고 봐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최군의 행동에 대한 배심원 판단은 유죄 3명, 무죄 9명이었다. 재판부는 배심원 의견을 종합해 최군의 취지는 정당하나 김군의 피해와 명예훼손이 심각하다며 유죄로 판결했다. 재판장을 맡은 왕윤정(18)양은 “피고인이 대학생이라는 점과 학교폭력을 막자는 취지를 참작했다”면서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동부지법 최문수 공보판사는 “이 사건은 실제 판사들도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우”라며 “무죄 선고도 가능할 듯하고, 선고유예 판결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재판에 참여한 한 학생은 “우리가 주변에서 접하는 학교폭력과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쉽게 하는 행동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실감했다”고 했다.
동부지법의 청소년 모의 국민참여재판은 다음 달 24일까지 총 9개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다. 이날 재판처럼 학교폭력 등 학생들과 밀접한 사건을 다루게 된다.
신상목 기자, 조성은 나성원 수습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