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늪에 빠지는 노인들
입력 2013-04-24 17:56
김순욱(78·가명) 할머니는 매일 아침 유모차를 몰고 거리로 나선다. 햇빛가리개와 안전벨트를 뜯어낸 유모차에는 갓 태어난 아기가 앉아 있지 않았다. 대신 신문지와 박스, 우유팩과 헌옷가지가 실려 있었다. 24일 서울 서림동 골목에서 만난 김 할머니는 “폐지를 줍겠다고 하니 고물상에서 손수레를 내 줬지만, 언덕길에서 끌기엔 무거웠다”고 말했다.
가파른 언덕길이 첩첩한 서림동과 대학동 고시촌 일대가 폐지를 줍는 김 할머니의 영업장소다. 할머니는 안면이 있는 주민을 만나면 인사처럼 “오늘 이사 가는 집은 없냐”고 물었다. 폐지를 발견하면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유모차에 옮겨 실었다. 할머니가 오는 시각에 맞춰 슬그머니 폐지를 내놓는 고시생들도 있었다.
할머니는 유모차를 몰기 힘들 정도로 폐지가 쌓이자 인근 고물상으로 향했다. 고물상 주인은 입구의 바닥저울에 폐지를 실은 유모차를 올린 뒤, 폐지를 뺀 유모차의 무게만을 다시 쟀다. 소수점 표기조차 안 되는 바닥저울은 냉정하게 할머니의 노동을 계량했다. 1㎏에 100원을 쳐주는 시세에 따라 할머니는 700원을 손에 쥐었다.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언덕길을 훑은 대가였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노인 빈곤율은 가처분소득이 중위 가구(전체 가구를 소득 순으로 줄 세웠을 때 정중앙에 위치하는 가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노인 가구의 비중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06년 44.9%였던 이 비율은 2011년 48.8%까지 올랐다. OECD 회원국의 평균 노인 빈곤율은 13.5%다.
초고령화 사회에 직면한 우리나라에서 노인 빈곤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고용시장은 노인을 외면하고, 금융권은 이들을 가계부채의 뇌관이라 부른다.
2002년 0.5%였던 65세 이상 실업률은 지난해 2.1%까지 높아졌다. 생계난에 시달린 노인들은 제2금융권을 찾아가 연 42%의 고금리 빚을 지고 있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고금리 채무를 10%대의 저금리대출로 전환하는 바꿔드림론 신청자 중 60세 이상 비중이 2010년 6월 말 1.0%(214명)에서 지난달 말 1.9%(2906명)로 높아졌다고 밝혔다.
고물상 간이의자에서 한숨을 돌린 김 할머니는 “부지런히 돌면 하루에 3000원은 번다”며 다시 유모차를 언덕길로 밀어 올렸다. 기왕이면 평탄한 곳에서 일을 하시라고 권했더니, 할머니는 “거기엔 이미 다리 힘이 없는 노인들이 많이 가 있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