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풍향계-류여해] 성범죄 관련 특별법의 과부하 현상

입력 2013-04-24 18:50


“부처간 이기주의로 산재된 법을 하나로 정리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형법,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특정 범죄자에 대한 보호관찰 및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 성폭력범죄자의 성충동약물치료에 관한 법률,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이상 법무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상 여성가족부), 군형법(국방부), 경범죄처벌법(경찰청).

위에서 열거한 법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성과 관련된 법률이란 점이다. 각각 소관도 다르고 내용도 조금씩 상이한 법률들로, 우리 생활을 규율하고 있는 성범죄 관련 일반법과 특별법이다. 직장 내 성희롱까지 포함하면 성범죄 관련 법률명은 두 배 이상 늘어난다.

몇 개 사례를 들어보자. ‘성인 남성 갑이 성인 여성 을을 강간하였다.’ ‘성인 남성 갑이 성인 여성 을의 몸을 지하철에서 가볍게 만졌다.’ ‘성인 남성 갑이 10세 아동 을을 강간하였다.’ ‘군인 갑이 군인 을을 추행하였다.’ ‘거리에서 갑이 바바리맨 행위를 하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에서 위 사례를 각각 어떤 법으로 처벌하면 좋을지 정확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성범죄를 담당하고 있는 경찰과 검사에게 양심에 손을 얹고 답하길 원하며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빠르게 개정되고 있는 성범죄를 처벌하는 현행 법률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는가?”라고.

우리는 높은 형량을 받아야 할 성범죄의 가해자인 피고인이 특별법 대신 일반법을 적용한 검사의 실수로 인해 낮은 형량을 받은 조두순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당시(2009년) 성범죄자에 대한 형량을 올리라는 여론은 뜨거웠고, 성범죄 관련 특별법이 산재돼 있다는 문제점이 여러 차례 지적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달라진 것은 없다. 많은 성범죄 관련 특별법이 여론의 움직임에 따라 개정을 반복하며 누구도 알지 못하고 체계성이 없는 흉물스런 법의 형태로 변해가고 있다. 여전히 넘치고 산만한 성범죄특별법이 정비조차 되지 않고 있다.

얼마 전 개정된 경범죄처벌법에서 ‘과다노출은 바바리맨을 처벌하기 위한 조문’이라는 경찰의 어이없는 발표도 있었다. 바바리맨의 행위가 고작 5만원짜리 처벌만 받으면 다시 해도 되는 가벼운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성범죄 관련 법률에 대한 재정비의 목소리가 아무리 높아져도 정비되지 않는 것은 분명 각 부처 간의 밥그릇 싸움 때문일 것이다. 성범죄는 사회악 중에서 반드시 근절돼야 할 악임에도 불구하고 법령의 정비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 국격에 맞지 않는 부끄러운 일이다. 사회악을 근절해야 할 시점에 각 부처가 서로의 이권다툼에만 급급하면 우리가 우려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피고인 당신은 강간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법률명을 고르시면 그 법률에 따라 당신에게 맞는 형벌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사안은 너무 복잡하여 법률을 고르기가 어렵습니다. 법률 디도스(과부하) 현상에 의해서 당신은 무죄입니다.” 이렇게 특별법만 늘어나게 되면 인터넷상의 ‘서비스 거부(denial of service)’인 디도스 현상이 법률에 적용되어 성범죄특별법의 디도스 현상이 생길지도 모른다. 적용이 난해하거나 중복적용 등의 갖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다.

산재된 성범죄특별법을 연령과 법정형, 가중처벌과 소급효문제, 공소시효, 그리고 친고죄 등 여러 분야를 일관성 있게 하나의 성범죄특별법으로 정리하여 누구나 알 수 있는 법이 되도록 해야 한다. ‘법률 적용을 잘못했다’라는 변명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읽기 쉽고 알기 쉬운 법이 친절한 법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때 그 법을 이해하게 되고 준법정신도 생겨날 수 있다. 적어도 자신이 지켜야 될 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법은 더 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법률이 산재되어 발생하는 법률 과부하 현상, 법률 디도스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방치하면 더더욱 안 된다.

류여해 한국사법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