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서 현대까지 역사 향기 그윽한 ‘성주가야길’
입력 2013-04-24 17:11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거친 피부의 성밖숲 왕버드나무 고목에서 연둣빛 새순이 돋아났다. 세월의 무게를 감당할 나이가 지난 때문일까. 어떤 고목은 지주목에 의지해 누워 있고, 어떤 고목은 태풍에 가지가 부러져 엉성하다. 한여름에는 그늘이 되어주고 한겨울에는 바람을 막아주며 살아온 지 어언 수백 년 세월. 오후의 따스한 봄 햇살이 터지고 갈라져 울퉁불퉁한 질감의 줄기를 어루만진다.
사람 사는 고을에 역사와 문화의 흔적이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 성산가야의 옛 도읍지이자 성주참외로 유명한 경북 성주도 찬찬히 뜯어보면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짙은 고장이다. 성주는 고려에서 조선 중기까지 약 600년 동안 대구 김천 구미 칠곡 고령 일원을 관할하던 경산부(성주목)가 있었던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 성주 읍내를 에두르는 12㎞ 길이의 ‘성주가야길’을 시나브로 산책하면 어느새 역사책의 한 페이지 속으로 들어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성주가야길의 출발점은 성주읍성의 서문 밖에 위치한 ‘성밖숲’.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된 성밖숲은 300∼500년 수령의 왕버드나무 57그루가 성성한 단순림으로 조선 중엽에 서문 밖 마을의 소년들이 까닭 없이 죽는 등 흉사가 이어지자 지관의 권유로 밤나무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어내고 다시 왕버드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온다.
여느 숲과 달리 성밖숲은 평지에 조성돼 성주군민의 휴식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어른 두세 명이 껴안아야 할 정도로 굵은 왕버드나무는 본래 낙동강 지류인 이천(利川)을 따라 14㎞나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대부분 잘려나가고 성밖숲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성밖숲 입구에는 가수 백년설(1914∼1980)의 ‘나그네 설움’ 노래비가 위치하고 있다. 성주 출신인 백년설은 일제강점기 시절 가요계에 입문해 나라 잃은 민족의 한과 서러움을 담은 ‘번지 없는 주막’ 등 수많은 애창곡을 히트시켰으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을 겪고 있다. 백년설의 본명은 이창민으로 고려 후기 문신인 이조년의 후손. 이조년은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로 시작되는 ‘다정가’를 남긴 시조작가로 유명하다.
이천 제방을 걷던 성주가야길은 1960∼70년대의 풍경이 오롯한 성주장터를 한 바퀴 돌아 쌍도정이 있던 성주버스정류장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다. 쌍도정은 성주 관아 객사인 백화헌의 남쪽 연못에 있던 정자로 고산 윤선도가 성주 목사 재임시절에 건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네모난 연못에 두 개의 섬을 만들고 그 섬을 가느다란 다리로 연결한 쌍도정은 겸재 정선의 ‘쌍도정도(雙島亭圖)’ 모델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조선 후기에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이 성주에서 귀양생활을 하다 사약을 받고 죽은 독섬을 비롯해 척화비가 세워져 있는 성주여고, 1983년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파사건 때 순직한 서석준 부총리를 기리기 위해 생가터에 건립한 청사도서관, 김창집을 기리는 충헌각 등을 둘러본 성주가야길은 성주 이씨 재실인 봉산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한 봉산재 입구에는 성주 이씨 출신으로 시문에 능통한 인물들의 글을 바위에 새긴 시비공원이 조성돼 있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마라’로 시작되는 ‘오로시’의 작자 이직은 이조년의 증손자.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글을 새긴 시비로, 임진왜란 때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출정했던 이여송은 조선인의 후예로 성주 이씨 가문이다.
이층 한옥으로 창호 등이 부분적으로 일본식인 만산댁, 만산댁 주인이 분가하는 아들을 위해 지어줬다는 배리댁은 경상북도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근대가옥. 이곳에서 보물로 지정된 성주향교 대성전을 둘러본 성주가야길은 비닐하우스가 바다처럼 펼쳐진 들판을 가로질러 한개마을로 향한다.
낙동강변에 위치한 성주는 우리나라 참외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참외의 고장. 1940년대부터 시작된 참외농사는 비닐하우스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1980년대부터 재배면적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현재 성주에서 참외농사를 짓는 농가는 4500여 호. 수확철을 맞아 비닐하우스 틈새로 새어 나온 참외의 은은한 향기가 발걸음을 잡는다.
돌담이 아름다운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가 550여 년 동안 살아온 집성촌으로 250여 년 전에 지어진 하회댁을 비롯해 기와집과 초가집 70여 가구가 옹기종기 처마를 맞대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돌담길은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 ‘하회댁’이란 택호가 붙은 전통 한옥 앞에서 잠시 멈춘다. 정원이 아름다운 하회댁은 종부가 안동 하회마을에서 시집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하회댁을 비롯해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7채의 전통 한옥은 대부분 빗장이 채워지지 않은 열린 공간이다. 대부분의 전통 한옥은 대문채를 들어서면 아담한 사랑채와 정원이 나타나고, 돌담과 연결된 중문 안에는 안채가 숨어 있는 구조다. 따라서 이곳 사람들은 나그네가 조용하게 사랑채와 정원을 살펴보는 것을 굳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한개마을에서 가장 멋스런 집은 영화 ‘춘향전’ 촬영장소로도 이용된 한주종택. 나뭇결이 선명한 대문에는 ‘반공’ ‘방첩’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녹슨 패찰이 아직도 붙어 있다. 낙동강 전선의 후방에 위치해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꽤 많은 피해를 본 마을의 역사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한주종택의 한주정사 누마루는 한개마을의 지붕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의 뒤주에 돌을 얹으라는 어명을 거역하고 낙향한 북비댁의 돈재 이석문 등 33명의 과거 급제자를 내고도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린 선비들이 살다 간 한개마을. 고풍스런 한개마을의 돌담에는 전통을 고수하는 영남 선비들의 정신이 오롯이 배어 있다.
성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