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땀’ 29억 왼손 모르게 기부

입력 2013-04-23 18:16 수정 2013-04-23 22:38


88세의 재일동포 의학자가 한국의 저소득층 홀어르신들을 위해 써 달라며 평생 모은 29억여원을 쾌척했다.

23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따르면 일본 삿포로에서 혼자 살고 있는 익명의 기부자가 “평생 독신으로 살며 의학 연구에 매진해 모은 재산을 외롭게 살아가는 고국의 노인들을 돕는 데 사용하고 싶다”는 장문의 편지(사진)와 함께 22일 모금회에 기부금을 보내 왔다. 그가 보낸 245만 호주달러(한화 29억1400만원)는 현재까지 개인이 모금회에 기부한 최고액이다.

그는 편지에서 “70년 넘게 일본에 살면서 차별도 많이 받았지만, 주변 도움이 없었다면 학문에 매진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 남은 생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남을 돕는 것은 원래 조용하게 하는 것”이라면서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모금회 관계자가 지난달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기부자의 뜻을 확인했다.

1925년 평안북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조국의 해방 소식을 들었지만 남북이 갈라지면서 북에 있는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 이후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명문 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의대를 졸업한 그는 오사카 대학병원 정형외과 전문의로 5년간 근무한 뒤 삿포로대 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연구에 몰두하느라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그는 세계적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3건의 논문을 싣는 등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았고, 연구결과로 얻은 특허권을 제약회사 등에 팔아 재산을 모았다.

그는 퇴직 후 호주에서 13년간 살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삿포로의 66㎡ 연립주택에서 검소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타국생활을 혼자 헤쳐나가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귀화했지만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잊은 적이 없다”면서 “일제와 전쟁 등 동시대 아픔을 고스란히 겪으며 이제 힘없고 외로운 존재가 된 조국의 또래 노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모금회는 이 돈으로 전국 249곳의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를 통해 선정된 저소득층 홀어르신들을 지원할 계획이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