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마을에 오페라의 선율이 흐르다
입력 2013-04-21 17:35 수정 2013-04-21 17:40
국립오페라단, ‘방방곡곡 문화공감’ 해남서 올 첫 공연
“브라보! 브라보!”
지난 18일 밤 국토 최남단 전남 해남군에 위치한 해남문화예술회관. 앙코르곡 ‘오 솔레미오’가 울려 퍼지자 700석을 꽉 채운 관객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부터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온 꼬마들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두 차례의 앙코르곡이 끝나도 기립박수가 멈출 줄 모르자, 성악가들은 ‘고향의 봄’을 함께 부르자고 제안했다. 700여명이 서로 손을 맞잡고 오페라 가수와 함께 ‘나의 살던 고향은…’을 부르는 순간 객석은 왠지 모를 뭉클함에 하나가 됐다.
서울에서 천리 길도 넘게 떨어진 땅끝마을 해남. 국립오페라단이 이곳을 찾았다. 해남 유일의 문화공간인 해남문화예술회관 2002년 개관 이래 처음이다. 이번 공연은 국립오페라단의 ‘2013 방방곡곡 문화공감’ 사업의 하나. 문화소외지역을 찾아 공연을 올리는 프로젝트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지원했다. 해남은 땅끝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울릉도’ 못지않은 공연계의 오지로 여겨졌고, 아티스트에게도 해남 무대에 서는 것은 특별한 일로 인식돼 왔다.
공연 티켓 가격은 자리에 따라 3000원, 5000원. 국립오페라단이 온다는 소문이 나자 해남은 물론 진도 완도 목포까지 들썩였다. 현장에서 표를 구입하기 위해 전북 김제에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온 관객도 있었다. 당연히 전석 매진. 서서라도 보겠다는 요구가 빗발치자 해남군은 계단에 앉을 수 있는 입석표까지 준비했다.
국립오페라단은 이 공연을 위해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 때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자막판과 무대장치, 오케스트라 의자 등을 공수해왔다. 55명 규모의 로열심포니 오케스트라도 함께 왔다.
오후 7시30분 전통 한지를 모티브로 한 무대 위로 은은한 조명이 켜졌다. 대부분의 관객이 눈앞에서 성악가가 직접 아리아를 부르는 것을 보기는 처음. 공연 초반에는 가끔 카메라 플래시가 켜지고, 잡담 소리도 들렸지만 관객들은 곧 아리아 속으로 빠져들었다.
공연은 갈라 콘서트 형식으로 90분 정도 진행됐다. ‘봄의 소리 왈츠’ 연주를 시작으로 김정아(소프라노) 김지선(메조소프라노) 김남두(테너) 강기우(바리톤) 등 4명의 성악가가 ‘동심초’ 등 우리 가곡을 차례로 선보였다. 이어 ‘라보엠’ ‘카르멘’ ‘투란도트’ ‘라트라비아타’ 등에 나오는 유명 아리아를 들려줬다.
사회까지 맡은 테너 김남두는 오페라가 무엇인지부터 각 아리아에 대한 설명까지 재치 있는 입담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가 “공연이 좋으면 ‘브라보’라고 외쳐달라”고 하자 객석에서는 연신 환호가 이어졌다.
아내, 아들 둘과 함께 공연장을 찾은 이지현(36)씨는 “오페라 공연은 처음 봤다. 해남에서도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어 기뻤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김은숙(64)씨는 “노래만 하는 게 아니라 사회자가 곡 해설을 해주고, 분위기를 재미있게 이끌어 줘 신이 났다. 이번에는 오페라에 대한 기본 지식과 유명 아리아를 들었으니 다음에는 ‘라보엠’ 같은 전막 공연도 여기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의준 국립오페라단장은 “예상외로 호응이 커 놀랐다. 해남군민의 내재해있던 문화욕구가 폭발한 것 같다. 특히 공연 마지막 순간엔 객석 모두 하나가 된 것 같아 울컥했다”고 감격스러워했다. 그는 소도시뿐 아니라 학교 병원 교정시설처럼 오페라를 접하기 어려운 곳으로 찾아가는 공연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성악가들은 공연을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게 반응이 좋은 곳은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철환 해남군수는 “시골에서 오페라를 할 수 있을까, 관객들이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한 번 시도해보자고 했는데 반응이 좋아 기쁘다. 앞으로 다른 공연도 적극 유치하겠다”고 말했다.
해남=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