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현미] 사라진 감정
입력 2013-04-21 19:12
프랑스어의 ‘아세디(acedie)’는 지금은 사라진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6세기 수도원에서 무척 유행했다. 어찌나 유행했던지 한때 여덟 번째 큰 죄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 말은 ‘영적인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의 나태’를 가리키며 무의미함과 연결되어 있다. 일종의 영적 사기 저하, ‘수도승의 영혼이 황폐해져서 활력을 잃고, 자신이 영적 차원을 지닌 신의 피조물임을 더 이상 의식하지 못하는 피폐한 상태’를 가리킨다. 신에 대한 의무가 최우선이던 시대에는 이러한 감정이 분명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미래학자 도미니크 바뱅의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이라는 책에 쓰여 있는 위 글을 읽으면서 생각해본다. 6세기를 살다 간 인류에게는 필요해서 존재하던 감정이 현대인들에게선 사라진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문제이지만 복잡하고 다양하고 파편화된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그리하여 신에 대한 의무가 최우선일 수 없는 우리들에게는 ‘영적인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의 나태’를 표현하는 그 감정의 단어는 더 이상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사라졌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 사회가 강요하기 때문에 사라지고 있는 감정들은 없을까? 나는 나의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TV나 영화를 빼고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남자들이 우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피아노 건반 이론’에 따르면 개개의 사회는 같은 감정적 건반을 가지나 그 사회가 진작시키거나 약화하려는 가치관에 따라 건반을 연주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한다. 아버지는 맵고 뜨거운 것을 먹을 때면 냅킨 한 통을 다 사용해야 할 만큼 땀을 뻘뻘 흘리셨다. 나는 혹시 저 땀이 그동안 사회의 강요해 의해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눈물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수도꼭지 하나 고장난 것 때문에 욕실 세면대 온수를 1년 이상 사용하지 못했었다. 수도꼭지 하나 수리하려고 비싼 출장비를 내고 전문가를 부르기도 뭣해 차일피일 미루다 그렇게 되어 버렸는데 평소 도움을 많이 받는 남자 후배에게 부탁했더니 스패너를 들고 이리저리 돌리더니 금방 고쳐주는 게 아닌가. 아무튼 후배 덕분에 1년 넘게 불편했던 감정들이 콸콸 쏟아지는 온수에 깨끗하게 씻겨 후련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왜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1년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안현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