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정종미] 가미노 온도

입력 2013-04-21 19:13


혼자서 일본 여행을 갔다. 도쿄나 교토 방면은 많이 다녔으니 이제 다른 곳을 더듬어 볼까. 어디든 전통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이면 된다. 깊이 헤아릴 것도 없이 나고야를 선택했다. 3박4일의 여정인데 관광 가이드북에 소개된 가미노 온도를 보고선 어떻게 종이가게가 관광명소가 될 수 있는지 의아해하며 이곳을 찾게 되었다. 첫날 둘러본 나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이곳에만 집중하기로 하였다. ‘가미노 온도’ 즉 ‘종이의 온도’라는 뜻인데 정말 종이의 체온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일본의 전통종이인 화지 즉 와시뿐 아니라 동서양의 수제종이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더하여 여기가 일본 관광명소 중의 하나라는 것이 신기하였다. 그들에게 이런 문화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에 다소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관광명소인 나고야 종이가게

이곳에서 나는 기대하지 못했던 풍성한 잔칫상 앞에 선 사람마냥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흠모해온 지인을 만난 기분이랄까. 암튼 이런 순간에 내 몸은 평상과 다른 반응을 보인다. 호흡이 가빠지고 발아래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네팔이나 티베트의 종이에서는 현대라는 문명을 읽을 수 없다. 플라스틱한 요소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이 고답적인 종이는 낙후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명상적이다. 이 종이는 오래전 원시의 여정 속으로 나를 끌고 간다. 종이에 담겨진 은밀한 속삭임에 몰두하며 나는 그곳 사람들의 소박한 심사를 읽어낼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것, 변함이 없는 것들에 대한 믿음. 종이에서 울려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은 나를 정화시킨다.

태국 등 동남아시아의 종이는 화려한 열대의 낭만에 젖게 한다. 종이의 섬유 속에 묻어 있는 꽃잎은 열대바다의 냄새를 전해주고 바나나껍질로 만든 종이는 촉감만으로도 열대수의 그늘을 느끼게 해주니. 나는 이미 백사장 밀모래의 바닷가를 거니는 듯하다.

멕시코 종이 타파나 남미의 종이는 매우 툭져서 종이라기보다는 오래된 고목나무의 등걸처럼 보인다. 짙은 갈색은 등걸의 깊고 중후한 원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아마존의 정글이나 밀림의 흙빛을 연상시킨다.

일본의 종이는 다양하다. 전통에만 머물지 않고 현대적 미감에도 적극 어필하며 일본만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화지를 감상하다 보면 이들이 얼마나 전통을 존중하며, 이것을 현대화하기 위해 얼마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게 된다. 이렇게 화지는 일본만의 특징 즉 왜색을 잘 전해준다.

서구의 수제 종이 역시 손으로 만든 것이라 매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종이는 이미 너무 논리적이거나 기계적이어서 나를 꿈꾸게 하기에는 조금 미진하다. 한국의 닥종이도 있었는데 전혀 가공되지 않은 아주 원천적인 모습이었다. 닥종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질긴 종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보다 더 다양한 문화를 담아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한국 닥종이 문화도 개발해야

가게 주인이 곧 끝나는 시간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도 여운은 길게 가는 법! 몹시 흡족하여 돌아온 나는 식사를 거르고도 배부른 느낌이었다. 나고야는 이 가게 때문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가게는 정초에 나에게 신년카드를 보낸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시하는 그들의 철학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고야를, 가미노 온도를 그냥 마냥 즐길 수만은 없다. 세계 최고의 우량 닥나무가 성장하는 한반도에 살면서 방바닥, 천장, 문 심지어 요강과 수의까지 종이로 발라가며 삶을 나누어왔다. 찬란한 종이문화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면서 왜 우리에겐 ‘가미노 온도’가 없는 것일까. 닥종이의 역사와 문화가 사라져 가는 만큼 우리의 삶 역시 퇴색을 피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정종미(고려대 교수·디자인조형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