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코피

입력 2013-04-19 17:25 수정 2013-04-19 20:34

또 코피가 났다. 뚝 뚝 떨어지는 정도의 코피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로나 피로 때문에?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니다. 모르긴 해도 가계의 유전적 성향이 근본 원인일 게다. 기관지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겨울만 되면 목에 수건을 두르고 부엌일을 하시곤 했다. 두 동생은 어릴 적 편도선 수술까지 받았다.

사막교부들의 금언집

나도 기관지가 좋지 않았다. 콧물과 가래가 계속 생겨 수시로 코가 막히고 목이 잠기는 것이 언제 적 부터인지 모른다. 몇 년 전 이비인후과에 갔는데 30대 중반이나 될까 한 젊은 여의사가 내 코를 들여다보더니 불쑥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콧구멍 후비지 마세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평소 나의 아내가 질색하곤 하던 그 은밀한 버릇을, 난생 처음 보는 이 여자 의사는 어떻게 알아냈을까. 아니, 설령 그 비밀을 알아냈다고 해도 낯선 중년의 신사를 앞에 놓고 어린애 나무라듯 어떻게 그리 쉽게 야단칠 수 있을까. 설령 내 콧속에 상처가 났더라도 그게 그녀가 그렇게 화를 내다시피 할 일인가.

당황한 데가 머릿속까지 복잡해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눈치를 챘는지 의사는 능숙한 선생님처럼 부드러운 어투로 독특한 처방을 일러주었다. “콧물 때문에 콧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면봉에 기름을 발라 콧속을 가볍게 마사지해 주세요.” 의학개론서에는 나오지 않을 법한 처방이지만 때론 과학보다 직관적 경험이 유용한 법이다. 그 후론 그의 직관에 기대어 나는 올리브기름을 바른 면봉을 손에 쥐곤 했다. 얼마 전 목과 코의 염증이 심해져 동네 이비인후과를 찾은 적이 있다. 이번에는 60대 정도의 남자 의사였다. 코피를 방지하기 위해 기름 바른 면봉을 사용하라는 모 이비인후과의 오래된 처방을 말해주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런 처방은 수십년간의 의사생활에서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그는 상식에 호소했다. 그의 말인즉슨, 건조해서 코피가 난다면 ‘상식적으로’ 가습기로 습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의사의 직관 이상으로 노의사의 상식이 그럴 듯해 보였다. 그래서 요즘은 가습기를 온종일 틀어놓고 면봉은 가끔씩만 든다.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는 병에 대한 언급이 아주 많이 나온다. 105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단 한번도 병에 걸린 적 없던 안토니오스는 특별한 경우다. 그는 마지막 호흡을 내쉬는 순간까지도 건강한 몸에 영안(靈眼)까지 맑았다. 만106세에 세상을 떠난 내 아내의 외할머니도 안토니오스 같은 건강을 누리신 분이다. 100년 이상을 사시면서도 할머니는 감기로라도 병원 문턱을 드나든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것은 일반적인 삶과 거리가 멀다.

‘금언집’에서 질병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은, 아무리 오랜 연수를 누린 자라도 결국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황실의 실력자였던 아르세니오스는 화려한 삶을 버리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와 50년 이상 살다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로마나 여타 대도시의 귀부인들은 그를 만나려고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왔다. 자칫 죽음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항해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가 더 소중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명망 높은 삶을 살았다 해도 인류의 숙적인 육체의 질병은 어김없이 그를 공격했다. 가진 것을 다 나누어주었고 병 때문에 손노동도 할 수 없으니 타인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위해, 내가 자선을 받아 마땅하도록 하셨으니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 홀로 그런 믿음을 가졌던 건 아니기에 외로움이 덜했을 것이다. 피라미드가 줄지어 있는 테베 출신의 압바 요셉은 이런 말을 남겼다. “주님의 눈에는 세 가지가 귀하다. 병들었다 해도 다가오는 시련을 감사함으로 받는 때이다. 두 번째는 어떤 인간적인 계산도 섞지 않고 주님 앞에서 순수하게 행할 때이다. 셋째는 영적인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자신의 뜻을 내려놓을 때이다.” 철학자 니체가 육체적 병을 찬양한다고 비난했던 자들이 바로 이렇게 생각을 하는 사막 기독교인들이었다. 더 극단적인 자들도 있었다. 한 원로는 중병에 걸려 다량의 피를 토해내곤 했다. 제자는 진통에 효능이 있는 열매로 죽을 끓여 맛보기를 청했다. 원로는 한참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하나님께서 앞으로 삼십 년 동안 나를 이 병에 두시길 바라네”라고 말하며 거절하였다. 이런 행동은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후 12:7)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몸의 신비와 하나님

코피가 좀 난다고 이런 처방 저런 처방을 기웃거리는 내 모습과, 사막 기독교인들이 걸어간 외골수의 우직함이나 극단이 서로 교차된다. 의학의 발전으로 인류 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문명이 진보한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만 같다. 의학을 이용하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과학이 몸의 신비를 밝혀주면 줄수록 더욱 겸허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결국 돌아가야 하는 인생이라면 일찍 돌아가는 것이 지혜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