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의승 (5) 초등 6년때 교회 첫 출석… ‘변화산 이야기’에 매료

입력 2013-04-18 17:13


누가 내게 “가장 신나는 때가 언제인가”라고 묻는다면 “하나님 이야기 할 때”라고 답하고 싶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우리 집안은 영일 정가로 포은 정몽주 선생의 후예다. 주자가 유가의 예법의장(禮法儀章)에 관해 상술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신봉했다. 고향인 강릉 학산에서는 10여년 전까지도 상투 튼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집안 모두가 제사를 드리는 데 목숨을 걸었고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다. 당연히 교회는 배척했다.

교회와는 한번도 접촉하지 못한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회에 한번 가보았다. 장성의 언덕배기에 있던 장성장로교회였다. 북한에서 월남한 같은 반 친구 오창학이 교회에 가보자고 권했다. 창학이는 이후 신학을 전공해 목사가 되었다. 영락교회 수석 부목사로 지내다 신촌장로교회에서 20년간 목회한 뒤 은퇴했다. 우리 우양재단에서는 매주 월요일 오전 8시30분 한 주를 시작하는 예배를 드린다. 그 예배를 오창학 목사가 인도하고 있다.

처음 교회에 가니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주일학교 선생님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 선생님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변화산 이야기를 해주셨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변화산에 가서 엘리야와 모세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이야기가 참 재미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변화산 이야기를 해준 분은 내가 초등학교 마치고 진학한 태백중학교 교장선생님의 아드님인 김영수 선생님이셨다. 교장선생님 댁은 아주 개화된 집안으로 김 선생님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도중 한국에 돌아와 잠시 있는 동안 주일학교 교사를 하신 것이었다. 이후 교회에 가지는 않았다. 어린나이였지만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을 하면서 땔감도 마련했다. 집안 가계의 3분의 1은 담당했다. 새벽 4시면 일어나서 갈탄을 가져왔다. 신문 배달을 하고 산에 가서 나무도 해왔다. 그리고 학교에 가다 보니 교회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성과 신문사 지국이 있던 금천과는 4㎞ 정도 떨어져 있다. 당시 밤길이 험해 호랑이가 나온다는 소문까지 돌던 구역이었다. 매일 그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신문을 배달했다. 신문 배달할 때 몇 가정에서 아주머니들이 나를 대견하게도, 딱하게도 보면서 앙금 떡과 따뜻한 국을 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동정 받는다는 생각에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사랑으로 생각하며 감사히 받아먹었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라서 지국에서는 배달료를 주지 못해 대신 신문을 50여부 주면서 팔아 쓰라고 하기도 했다.

아무튼 곤고한 나날이었지만 나름대로 낭만이 있었다. 당시에는 내 또래의 많은 아이들이 비슷하게 일하면서 공부했다. 지금 학생들을 보면 정말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요즘 학생들에게 ‘고생의 철학’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말 고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크는 것 같다. 고생을 모르면 인생을 알 수 없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는 말은 어느 시대에도 통용되는 진리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한다”는 말이 있다. 고생하지 않으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그 철학적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성경 속 인물 가운데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믿음의 선배들은 대부분 고난이라는 광야학교의 학생들이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는 욥의 고백과 같이 고난을 통한 단련이야말로 정금과 같은 인생이 되는 비결이다.

정리=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