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입력 2013-04-18 18:40


“그걸 꼭 중앙(정부)에서 일괄적으로 하달할 필요가 있을까요? 공통기준 몇 개만 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도록 하면 어때요?”

“그게 좋긴 하죠. 지자체마다 사정도 다른데. 저소득층이 많은 곳도, 맞벌이 부부 비율이 높은 지역도 있잖아요.”

잠시 대화가 멈춘 사이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지자체 보육위원회를 어떻게 믿어요? (민간어린이집) 원장들이 꽉 잡고 있는데.”

얼마 전 정부가 개최한 보육 관련 간담회 자리. 어린이집 입소 우선순위를 손보는 문제를 놓고 스웨덴 호주 사례를 열거하며 활발하던 분위기는 순간 허탈해졌다. 정부가 모든 걸 틀어쥐는 대신 지방에 자율권을 주자는 ‘바람직한’ 논의가 진행되던 차였다. 뭐든 바꾸는 건 어렵지만 시도는 중요하다. 하지만 잘 나가던 논의도 이 질문에서는 벽에 부딪힌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부모봉양’이라는 인륜을 법으로 강제한 부양의무제는 벌써 수년째 정치적 논란이 되고 있다. 자녀들은 돈 줄 생각이 없는데, 정부는 “자녀에게 받아내라”며 가난한 노인들에게 생계비를 주지 않으니 ‘노인빈곤율 45%’는 논리적 귀결이다. 그렇다고 부양의무제를 없애자니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그래서 한때 사위와 며느리를 부양의무자에서 제외하자는 얘기가 돌아다녔다. 사위 월급이 올랐다고 장모가 자살하는 것은 최소한 막아보자는 취지였다. 다시 만나는 질문. 재산 빼돌리기는 어떻게 막을 건데? 실상 강남의 부자 아들이 모든 재산을 아내(며느리) 명의로 돌려놓고 부양의무를 회피하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질문 목록은 끝도 없다. 올 3월부터 0∼5세 영·유아에게 지급하는 10만∼20만원의 양육수당이 아빠들의 술값과 담뱃값으로 탕진된다면? 하루 2시간 ‘알바’하는 주부가 종일제 맞벌이로 돌변하거나, 요양보호사와 노인들이 담합해 ‘주2회를 4회 방문’으로 속이는 걸 어떻게 찾아낼까?

큰 도둑은 눈을 부릅뜨고 잡으면 된다. 하지만 정부가 복지제도를 설계할 때 맞닥뜨리는 거짓말은 놀이공원 입구에서 초등학생을 유치원생이라고 우기는 그런 종류의 사기들이다. 잠재적 범죄자들 역시 납세자이자, 수혜자인 국민 전체이다. 고민은 여기에 있다. 액수가 작고 가책도 거의 없으며 걸러내기도 쉽지 않은 무수히 많은 사기들을 대체 무슨 수로 적발해낸단 말인가. 주면서 아까워하고 받으면서 의심받는, 기분 나쁜 상황은 이렇게 벌어진다.

정부만 못 믿는 것도 아니다. 국민 쪽 불신도 만만치 않다. 대표 사례가 ‘국가가 법으로 국민연금 지급을 보장한다’는 여야의 최근 합의다. 공무원들은 “나라 망하지 않는 한 국민연금은 꼭 준다”는데, 국민은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되묻는다. 가히 만인의 상시불신상태라 할 만하다.

복지확장기인 요즘, 한국 사회의 ‘신뢰’ 인프라가 빈약하다는 사실은 비용으로 확인되고 있다. 새 복지제도가 도입될 때마다 수십 가지 단서 조항이 따라붙어 수혜자를 솎아내고, 권한을 분할하고, 감시를 강화한다. 공짜는 없다. 여기에는 막대한 행정비용이 든다. 불신이 낳는 사회적 비용 중 복지비용은 일부일 뿐이다. 학자들 중에는 신뢰가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이도 있다. 신뢰가 무형의 고속도로라면, 자갈밭 대신 고속도로로 소통하는 사회에서 경제활동의 물류비용이 낮아진다는 건 이치에 닿는 말이다. 불행히도 신뢰의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아니다. 한 사람의 결단이나 투자로 건설할 수 없으니, 더욱 고민이다.

이영미 정책기획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