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얼룩으로 남은 사내의 이야기
입력 2013-04-18 17:21 수정 2013-04-18 21:30
이기호 창작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
소설가 이기호(41)의 창작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문학과지성사)는 우리 시대 ‘이야기의 생태학’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야기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있는데, 사적인 영역은 공적인 영역에 가려진 나머지 마치 팬티에 남은 얼룩처럼 취급받고 있다는 고민이 그것.
수록작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의 주인공은 군대에서 전역한 지 일주일 된 24세 청년이다. 그는 제대한 지 이틀 후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듣고,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다시 징집될 게 뻔하다는 생각에, 형이 살고 있는 서울의 원룸으로 슬그머니 옮겨온다.
어느 날 형의 반바지를 입고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온 그는 현관문이 잠기는 바람에 난감해하다가 담배 가게 여주인과 다투게 된다. “총각, 아무리 더워도 그렇지. 그렇게 빤스만 입고 돌아다니면 어떡해?” 팬티냐, 트렁크냐, 반바지냐를 놓고 옥신각신하던 그는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로 몰리고, 경찰서에 가서 신원조회까지 하고서야 겨우 풀려나는데, 작가는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의 틈새에서 자신의 존재적 알리바이를 증명해야 하는 주인공의 처지에 초점을 맞춘다.
전쟁이 나면 즉각 동원될 수 있다는 국가 이야기, 팬티만 입었으니 변태가 분명하다는 담배 가게 여주인 이야기, 아직 전역 신고를 하지 않아 부대를 이탈한 탈영범일지도 모른다는 경찰 이야기 등등. 주인공 청년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외부의 이야기에 의해서만 자신을 입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청년이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입증해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은 차단되거나 박탈돼 있다.
표제작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교원임용고시에 실패하고 점점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 같아 두려운 화자가 김 박사라는 인물과 주고받는 상담으로 전개된다. 질문은 심각한 데 비해 김 박사의 대답은 “일종의 강박증세로 보입니다” 혹은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혹은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등 정작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으로 점철된다.
그러다 작품 끄트머리에 느닷없이 작가의 목소리가 첨부된다. “이제 다들 아셨죠. 김 박사가 누구인지? 자, 그럼 어서 빈칸을 채워주세요.” 실제로 책에는 반 페이지 가량의 여백(129쪽)이 있다. 이기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여백이다. 삶의 여백은 결코 채워지지 않은 미완의 영역이라고.
작가는 이야기의 생태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들려준다. “이것은 십수 년 전 어느 날, 내게 실제 있었던 일이다. 십수 년 전 일을 새삼 여기에 다시 꺼내든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내 안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고, 알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그것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윤리이다. 오직 그 윤리 때문에 이야기는 존재하는 것이다.”(‘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도입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