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더더기 없는 단아한 결빙의 시학… 홍성란 시집 ‘춤’
입력 2013-04-18 17:20
홍성란(55·사진) 시인의 신작 시집 ‘춤’(문학세계사)을 읽으면 오래 잊고 있었던 ‘시조’라는 장르가 생생히 살아나는 게 느껴진다. 92편의 수록 시 가운데 절반이 초장, 중장, 종장으로 구성된 단시조라는 데 특히 눈길이 간다. 이런 단아한 형식은 현대인의 복잡한 의식과 풍부한 상상력을 표현하기에 퍽이나 제한적이어서 웬만한 시조 시인들은 새로운 장을 추가한 연시조에 천착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단시조는 언어 조탁의 인내력을 시험받는 장르이기도 하다.
“얼마만 한 축복이었을까/ 얼마만 한 슬픔이었을까// 그대 창문 앞/ 그대 텅 빈 뜨락에// 세계를 뒤흔들어놓고 사라지는/ 가랑잎/ 하나”(‘춤’ 전문)
3장 6구 가운데 단 한 자의 군더더기가 없는 것은 물론 종장에 와서야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전말을 깨닫고 무릎을 치게 된다. 여기에 ‘춤’이라는 제목을 달았으니 이 시는 3장 6구로 이루어진 언어의 춤이기도 하다. 사실, 시조를 지극히 사랑하지 않고선 단시조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만큼 단시조는 ‘나의 존재 의미’와 닮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시조를 사랑하는 일은 시를 사랑하는 일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삶의 현장이 보여주는 적나라함과 그 다양성을 다의적으로 표현하는 시에 비하면, 시조는 가장 단순하고 단조로운 선으로 시적 대상을 포착하는 크로키와 같기 때문이다.
“갠 하늘 그는 가고/ 새파랗게 떠나버리고// 깃 떨군 기슭에 입술 깨무는 산철쭉// 아파도/ 아프다 해도/ 빈 둥지만 하겠니”(‘그 새’ 전문)
날아가 버린 새가 남겨놓은 두어 개의 선으로 이별 후의 쓰라진 정감이 허공에 그려져 있는 것 같다. 홍성란의 시 세계는 이렇듯 인간사의 면면을 자연의 풍경에 빗대어 말하는 솜씨로 빚어지지만 그 음보는 현대적인 감성으로 편곡되기도 한다. “그때 본 영화가 뭔지/ 감또개 같은 계집애는 모른다// 동시상영관 화면 가득 빗발치는 극장 안에서 컴컴한 아버지가 박수 치자 얼굴 쳐다보며 덩달아 박수를 쳤다 손바닥이 아프도록 아버지의 기특한 가상현실은 무엇이었나// 연극을 끝내버린 아버지/ 박수는 가끔 치시나”(‘경신극장’ 전문)
시조는 뜨거운 내면을 결빙하는 얼음과도 같다. 말하고자 하는 것을 속에 감추고 오래 침묵하는 시인이 홍성란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