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에 빠진 경제 구하려면 지금 당장 돈을 풀라

입력 2013-04-18 17:29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폴 크루그먼/엘도라도

정부가 최근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17조원 남짓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키로 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역대 두 번째 규모라는 점에서 재정건전성 악화를 우려하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나라 곳간을 대거 풀기로 한 정부 조치에 박수를 보내는 신간이 나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재정지출 확대를 주장하는 케인스주의자의 대표 격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신작을 내놓은 것이다. 전작 이후 5년 만에 나온 책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는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논지는 분명하다. 재정지출을 확대하라. 일각에서는 유럽 재정위기를 예로 들며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반대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덮친 지 5년이 지났지만 세계 경제는 아직도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까지 위기 원인만 분석할 것이냐고, 지금 행동을 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치료법이 이미 나와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경제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과 비슷한 대침체 상황이며, 당시 영국의 존 케인스를 비롯한 많은 경제학자와 정치인은 답을 알고 대처했기에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계속해서 경기부양책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얘기다.

비유가 재미있다. 배터리만 갈면 자동차가 쌩쌩 달릴 수 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편은 자동차 배터리를 갈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배터리를 간다면, 그동안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대신 남편은 가족들에게 걸어 다니거나 버스를 타라고 말한다. 여기서 문제의 남편은 바로 공무원 임금 동결, 연금 삭감 등을 통해 국민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각국 정부다.

크루그먼은 현 경기침체가 2000년대 중반에 터진 주택 거품의 결과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거품이 꺼지면서 발생한 ‘수요 부족’을 해결하지 않고 이를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로만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실업률이 높고 경제 실적이 낮은 이유는 우리(소비자·기업·정부)가 ‘지출’을 충분히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못 박으면서 “지출 감소는 고용 하락을 가져왔고, 결국 우리 사회는 전반적 차원에서 심각한 ‘수요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과하게 투자됐던 부문 말고 다른 곳까지 투자 수요가 위축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루그먼은 이를 화폐 경제와 시장 특성 때문으로 본다. 다시 말해 현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진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유동성 함정은 돈을 빌리는데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수준까지 금리를 내려 유동성을 확대, 즉 돈을 풀었는데도 여전히 수요가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뜻한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 긴축한다고 위축된 투자 및 소비 심리가 풀어지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크루그먼은 국민과 국가의 지출이 곧 국민과 국가의 수입임을 강조하면서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정부마저 지출을 줄이면 도대체 누가 제품을 사겠느냐”고 되묻는다.

돈을 풀면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것이라는 재정지출 확대 반대론자들의 주장도 과도한 공포라고 잘라 말한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했던 2008년 9월부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대대적으로 돈을 찍어내던 3년 동안 소비자 물가는 연간 1.2% 뛰는데 그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돈을 아무리 풀어도 경기가 활성화되지 않으면 인플레이션이 생기지 않는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쯤에서 신문 경제면을 유심히 봤던 독자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 법하다. 세계 금융시장을 출렁거리게 했던 유럽 재정위기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유럽 재정위기는 정부 긴축론의 사례로 제시되고 있지 않은가.

크루그먼에 따르면 유럽 재정위기의 범인은 유로화다. 유로라는 단일통화를 사용함으로써 자국 통화를 그대로 유지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경제수단을 잃어버린 탓이다. 스페인을 예로 들어보자. 자국 상품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임금 삭감을 통해 제조비용을 낮춰야 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건 저항이 만만치 않다. 만약 자국 통화를 가지고 있었다면 스페인은 자국 통화에 대한 평가절하를 통해 임금 수준을 상대적으로 낮출 수 있다. 비슷한 상황의 아이슬란드가 자국 화폐인 크로나의 가치를 평가절하해 임금 수준을 25% 낮추는 효과를 본 것과 대조적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유럽의 재정취약 국가들이 가혹한 긴축 재정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흑자국가들마저 긴축프로그램에 몰두해 수출 전망을 어둡게 만들며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우려한다. 쾌도난마처럼 현 상황을 풀어가는 논리는 명쾌하지만 어조는 자못 흥분돼 있다. 때론 분노가 느껴진다. 재정지출 확대 반대론자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들 주장에 어퍼컷을 날리는 모습에선 사각의 링 위에 선 권투선수의 전의가 전해질 정도.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실업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그의 말대로 고용은 경제적 생산 활동을 넘어 인간 행복의 중요한 요소다. 분노의 어조는 책 첫머리에 쓴 헌사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 마땅한 실업자들께 이 책을 바친다.’ 박세연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