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甲’ 집주인은 알랑가몰라… 속타는 세입자 마음을

입력 2013-04-17 17:55 수정 2013-04-17 22:13


“집수리? 못해줘”… 배째라 횡포

지난달 결혼한 정모(30·여)씨는 넉 달간 발품을 팔아 결혼 직전 서울 영등포에 24평 아파트 전셋집을 구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집안정리를 하다 베란다 섀시 잠금장치가 고장인 걸 발견했다. 업체에 물어보니 섀시 전체를 갈아야 할 판이었다. 계약 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집주인에게 수리를 요구하자 “이미 계약이 끝났기 때문에 해줄 수 없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다시 요청했지만 주인은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정씨는 “정말 어렵게 구한 집인데 괜히 주인과 마찰을 일으켜 득될 게 없을 것 같아 100만원을 들여 수리했다”고 말했다.

2010년 금융위기 이후 주택시장에선 집을 사려는 사람이 없어 전셋값만 치솟는 상황이 계속돼 왔다. 주머니 사정에 맞는 전셋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려워지면서 집주인과 세입자의 ‘갑을(甲乙) 관계’는 더 심화됐다.

지난해 8월 개소한 서울시 전월세보증금지원센터에는 어렵게 집을 구한 세입자들의 하소연 섞인 문의전화가 하루 평균 200통씩 걸려오고 있다. 대부분 ‘집수리’ 문제로 집주인에게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다 거절당해 냉가슴 앓던 이들이다. 지난달까지 정식으로 접수된 상담 건수만 3081건이나 된다.

상담에 등장하는 집주인 유형은 다양하다. 우선 ‘연락두절’형이 있다. 서울 관악구 다세대주택에 세 들어 사는 이모(35)씨는 비가 오면 복도에 물이 새 누전으로 전기가 끊기곤 했다. 보수를 요구하자 집주인은 “다세대주택이라서 공용 공간인 복도의 누수는 나 혼자 책임질 수 없다”고 거절한 뒤로 이씨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서울 신길동에 원룸을 얻은 대학생 이모(22)씨는 ‘책임전가’형 집주인과 갈등을 겪다 상담을 요청했다. 계약 전에 둘러볼 때 별 문제 없던 방바닥 장판이 입주할 때 보니 20㎝가량 찢어져 있었고 세탁기는 탈수가 되지 않았다. 이씨는 “집주인에게 전화했더니 멀쩡하던 걸 내가 그렇게 만들어놨다며 오히려 수리비를 내라고 하더라”고 하소연했다.

‘배째라’형도 있다. 박모씨는 지난해 9월 집주인이 전셋값을 3000만원 올려달라기에 재계약을 포기하고 서울 성동구의 1억4000만원짜리 18평 빌라 전세를 얻었다. 그러나 집이 낡아서 매일 닦아도 화장실과 거실 벽에 곰팡이가 피었다. 보일러는 수시로 꺼졌고, 누수 현상까지 있었다. 집주인에게 수리를 요청했지만 주인은 “전에 살던 사람은 같은 조건에 아무 불만이 없었다. 그 가격에 살면서 수리까지 다 해달라면 어떻게 하느냐. 살기 싫으면 나가라”고 박씨를 나무랐다. 박씨는 견디지 못하고 지난 2월 다시 이사했다.

전월세보증금지원센터는 이런 문제를 집주인과 세입자가 원만히 합의할 수 있도록 간이분쟁조정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제도를 도입한 지 10개월이 다 돼가지만 합의 건수는 20여건에 불과하다. 센터 관계자는 17일 “분쟁조정은 양 당사자 모두 참여 의사를 밝힌 경우에만 가능한데 대개 집주인들이 참여하지 않아 사실상 조정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조정이 안 되면 세입자는 법원에 지급명령이나 소액사건재판을 신청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주택토지공사 전월세지원센터 관계자는 위에 언급된 네 건의 사례에 대해 “당연히 집주인이 수리해줘야 하는 것”이라며 “세입자들이 당연한 권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민법 623조에 따라 집주인은 임대계약이 존속하는 동안 세입자가 집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생활에 필요한 수리를 해줘야 한다”며 “세입자가 비용을 들여 수리했다면 이 역시 집주인에게 청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