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의승 (3) 삼척 탄광촌 촌놈, 서울대 생물학과에 합격하다

입력 2013-04-16 17:21


당시 진학반 학생 중 8명이 서울대에 도전했다.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갈 때 영주에서 중앙선 열차를 탔다. 내가 살던 탄광촌에서 늘 보던 열차는 석탄을 실은 여러 칸의 화차 뒤에 한 개의 객차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영주에서 본 열차들은 화차는 없고 객차만 있었다. ‘세상에 이런 기차도 있나’라는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깊숙한 촌에서 나는 자랐던 것이다. 서울에 도착해 효창동의 친척 집에 머물며 서울대 시험을 쳤다.

당시 서울대 의대는 동숭동에 있었다. 일본시대의 구식 건물 그대로였다.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 나를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 일찍 도착해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밴드의 연주 소리가 울리면서 10여대의 버스가 동숭동 캠퍼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울고와 경복고 등 당시 명문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시험을 치러 온 것이었다. 이들은 밴드의 연주에 맞춰 함께 교가를 부르면서 보무당당하게 캠퍼스에 들어왔다. 나는 그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됐다. 새삼 내가 ‘촌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시간에 수학 시험을 쳤다. 마치고 구내식당에서 자장면을 먹으면서 뭔가 내 생각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가졌다. 호기 있게 시험을 치러 왔지만 생각만큼 잘 보지는 못했다.

결국 의예과는 떨어졌다. 대신 2지망인 생물학과는 합격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해 수험생 성적이 아주 높아서 생물학과에 들어온 30명 가운데 29명이 의예과에 불합격돼서 온 학생들이었다. 생물학과에 들어온 학생들도 나름대로는 각 학교에서 수석을 한 수재들이었다.

나는 결과에 실망했지만 ‘일단 생물학과에 간 뒤 의예과로 전과를 하리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 영어수업을 받는데 학생들의 실력이 대단했다.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영어 교과서를 소설처럼 읽어냈다. 독일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떻게 생물학과에 붙을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대단한 실력의 소지자들이었다. 그런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 의대로 전과하기란 결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당국에서도 너무 많은 학생들이 의대 전과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고 아예 전과는 어렵다는 발표를 했다. 학교 당국의 발표에 생물학과 학생 몇 명은 학교를 나오지 않고 재수를 결심하기도 했다.

나는 집안이 너무 가난했기에 재수도 쉽게 결심할 수 없었다. 당시 김진만 의원의 서울 집이 인사동에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들어가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김 의원 부인이 나를 아들처럼 대해주셨다. 모교에서는 내가 서울대에 처음 들어갔다면서 아주 자랑스러워했지만 정작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서울대 생물학과를 마치면 대개 고등학교 교사로 갔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더 큰 꿈이 있었다. 한번 이 세상에서 나의 능력을 확 펼쳐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사관학교를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에는 돈 없는 학생이 공부하기 가장 좋은 곳이 사관학교였다. 그만큼 인기가 높아 경쟁이 심했다. 나는 왠지 해군에 가고 싶었다. 강원도 묵호에서 살 때 늘 바다를 보며 갈매기 그림을 그렸었다. 그래서 해양과 배는 친숙하게 다가왔다.

지금 인생을 되돌아보니 내 스스로 인생길을 개척한 것 같았지만 모든 길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가끔 ‘내가 서울대에 계속 다녔으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해본다. 인생길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분명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처음에는 고통스럽게 여겨질지라도.

정리=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