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도박장 잡는 ‘빨간머리 경찰관’

입력 2013-04-15 18:11 수정 2013-04-16 00:51


지난 9일 밤 서울 시흥동 먹자골목 근처의 ‘멀티방’에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녹색 ‘새마을 조끼’를 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벌써 열흘째 찾아온 손님이다. 술냄새가 진동했다.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말썽부리던 남자는 직원들이 내쫓으려 하자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가겠다’며 구석에 앉았다. 조는 듯 앉아 있던 그가 휴대전화를 몇 차례 만지작거리자 잠시 후 경찰이 들이닥쳤다.

이곳은 멀티방을 가장한 불법 도박·경마 게임장이었다. 경찰은 단속 때마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업주 이모(47)씨를 그 자리에서 검거했다. ‘만취’ 상태였던 빨강머리 남자는 멀쩡히 일어나 경찰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위장 수사에 나선 서울 금천경찰서 생활안전계장 오경종(47) 경위다. 금천서는 15일 이씨를 게임산업진흥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

이달 초 오 경위가 이씨의 도박장을 처음 찾았을 때 그의 외모를 보고 경찰로 의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손님 중엔 사흘에 500만원, 1주일에 2000만원씩 탕진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열흘간 위장 수사 끝에 오 경위는 이씨의 ‘무제한 베팅’ 도박영업 혐의를 확인하고 경마점수를 현금으로 바꾸는 환전소 위치까지 파악해 ‘D-데이’로 정한 이날 검거작전에 나선 것이다.

오 경위가 위장 수사에 뛰어든 건 약 1년 전. 그는 “지난해 초 부임한 뒤 사설 게임장 단속을 위해 손님으로 위장해 들어갔는데 업주가 내 머리 스타일과 옷을 보고 대번에 경찰임을 눈치챘다”며 “어떻게 의심을 피할까 고민하다 중국집 배달원을 콘셉트로 잡았다”고 했다.

그는 그 길로 동네 중국집에 가서 철가방을 구입하고 머리를 빨갛게 염색한 뒤 아들의 귀고리를 빌려 착용했다. 영락없는 중국집 배달원 모습이었다. 오 경위는 “배달원으로 위장해 수사를 벌였더니 단 한번도 발각된 적이 없다”고 했다. 그의 활약 덕에 지난해 금천서는 서울 31개 경찰서 중 불법 게임방 단속 실적 1위, 교차단속 실적도 1위를 기록했다. 오 경위는 “조만간 또 변신할 텐데 콘셉트는 영업비밀이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