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의승 (2) 젊은 날의 친구 가난이 가르쳐준 ‘땀의 神學’
입력 2013-04-15 17:19
태백에서 묵호로 임지를 옮긴 이후 아버님은 몸이 급격히 나빠져 일을 하지 못하셨다. 가장의 건강이 흔들리니 자연스레 가정 살림이 어려워졌다. 이후로 가난은 나의 벗이 되었다. 누님이 생계를 꾸려야 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4년 반 동안 신문 배달을 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평화신문을 한꺼번에 돌렸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장성지국에서 신문을 받아 배달했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는 것이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같다. 땀의 의미, 노동의 중요성을 어린나이에 체득했다. 일종의 ‘땀의 신학’을 체험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는 성경 말씀이 삶에 박혔다. 귀한 경험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비교적 성적은 좋았다. 그러나 현실은 잿빛이었다. 태백중학교를 졸업한 내가 갈 수 있었던 곳은 태백공업고등학교 뿐이었다. 거기에는 광산과와 전기과 두 개의 과밖에 없었다. 비록 어렸지만 이 같은 환경을 극복하고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형님과 누님이 대학을 가지 못했으니 나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공고에 진학하면 현실적으로 대학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당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는 동해시의 북평고등학교였다. 대학을 꼭 가겠다는 결심에 북평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쳤다. 수석을 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얼마 되지 않은 돈이었지만 내게는 큰 도움이 됐다. 동해에서 자취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2학년에 올라가자 하루는 당시 상업을 가르치시던 김형준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의승아, 요즘 어떻게 지내니. 하숙하고 있니?” “자취합니다.” “힘들지?” 선생님은 내게 북평 출신으로 당시 자유당 재정위원장을 하던 김진만 의원 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가라고 권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김 의원의 집에서 두 아들을 가르쳤다. 3학년 1학기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김 의원의 큰아들이 김준기 현 동부그룹 회장이다. 1년 남짓 김 의원 댁 자가용을 타고 등하교를 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던 내가 자가용을 타고 학교를 가게 된 것이었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다. 먹고 사는 일이 공부보다 더 중요했다. 학생들에게 꿈을 던져주는 분들도 적었다. 수업 시간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운동장 풀을 뽑는 등 각종 잡일을 많이 했다. 교과서를 다 끝내고 진학하거나 졸업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의식 있는 선생님 한 분이 학생들에게 제대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학교 측을 설득했다. 서울대 문리대를 갓 졸업한 영어와 수학, 국어 선생님을 모셔와 진학반을 만들었다. 학교 수업과 상관없이 진학반 학생들은 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지금은 모두 나았지만 나는 어릴 때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그래서 말더듬이가 살아가기 쉬운 직업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의사가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울대 의대를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점차 자신감이 생겨 시험을 치기만 하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고 3때 담임 선생님은 내게 서울대 의대가 아닌 다른 과를 지원하라고 권유했다. 그때까지 북평고에서는 서울대에 1명도 진학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1호 서울대 입학생’을 만들고 싶었으나 내 성적이 ‘의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합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하며 고집을 부려 서울대 의대 원서를 냈다. 2지망은 생물학과였다.
정리=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