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성접대’ 의혹만 갖고 덤벼… 거론된 인사 ‘명예 살인’
입력 2013-04-14 17:57 수정 2013-04-15 02:35
‘사회 지도층 성접대 의혹’이 세상에 알려진 지 14일로 한 달이 됐다. 경찰은 즉각 공개 내사에 착수하고 사흘 만에 정식 수사로 전환하며 의욕을 불태웠지만 의혹은 그대로다. 사건을 지휘하던 경찰청 수사국장은 최근 인사에서 지방경찰청으로 전보됐다.
릐‘풍문’에 춤춘 경찰=건설업자 윤모(52)씨의 고위 공직자 성접대 동영상이 있다는 소문은 올 초부터 법조계 안팎에 돌았다. 관련 내용이 보도되자 경찰은 지난달 18일 “신속하게 국민적 의혹을 풀겠다”며 내사 착수를 발표했다. 경찰이 신속하게 움직이자 성접대 의혹은 신빙성을 더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지금 경찰 수사는 개점휴업 상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성접대 동영상 속 인물의 신원 확인이 어렵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자 의혹의 핵심 근거가 흔들렸다. 경찰은 이후 “동영상보다 윤씨의 범죄 관련성이 중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윤씨 별장과 자택 등을 뒤늦게 압수수색했지만 뒷북이란 비난만 들었다. 핵심 피의자인 윤씨에겐 아직 소환통보조차 못했다.
게다가 경찰은 주요 관련자 출국금지 요청 때까지 국과수에 성접대 동영상 분석조차 의뢰하지 않았다. 출국금지 및 압수수색영장 신청 때는 해당 혐의의 공소시효가 지난 인물도 3명이나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사정 당국 관계자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란 이름에 경찰이 너무 흥분해 관련자 진술만 갖고 섣불리 덤벼든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고소인인 여성 사업가 권모씨가 경찰에서 동영상을 보고 곧바로 ‘김학의가 맞다’고 했다는데, 나도 그 동영상을 20번은 봤다. 그 흐릿한 영상을 보고 그렇게 진술한다면 당연히 의심했어야 한다. 경찰이 좀 흥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 내부에선 출구전략을 짜고 있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온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맡고 있는 경찰청 특수수사과 경찰관들이 수사팀에서 빠지고 싶어 한다는 말도 들었다”며 “부담을 많이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릐도 넘은 폭로·선정 보도 경쟁=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자 언론도 상식을 벗어난 폭로 경쟁을 벌였다. 이 사건은 한 종합편성채널이 법조계에 파다했던 ‘소문’을 기사화하며 공론화됐다. 진위 확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사건 당사자들의 일방적 진술에 의존한 보도가 이어졌다.
언론 인터뷰에서 “성접대 동영상을 직접 편집했다”던 윤씨 조카는 경찰 조사에서 인터뷰 자체를 부인했다. 경찰에서 “내가 김 전 차관을 접대했다”고 진술한 여성은 언론과 만나 “그런 일 없다”고 말을 바꾸는 촌극도 펼쳐졌다. 일부 언론은 성접대 정황을 그림으로 자세히 묘사하기도 했고, 성접대 상황을 재연한 방송 보도도 있었다.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김재영 교수는 “언론이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보다 흘러다니는 정보를 자극적으로 처리하는 데 치중했다”고 지적했다.
릐내팽개쳐진 인권=성접대 의혹을 받은 이들의 실명이 공개되면서 ‘마녀사냥’ ‘인격살인’ 논란도 일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실명이 거론된 이들은 씻기 힘든 상처를 입었다. 김 전 차관은 사퇴했고, 이철규 전 경기경찰청장은 ‘성접대 리스트’를 유포한 트위터 사용자 55명을 고소했다. 다른 인사는 이름이 거론되면서 가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검찰 출신 한 변호사는 “사건 핵심 당사자의 진술조차 받지 못한 채 출국금지 사실만 공개돼 증거인멸 시간만 길어졌다”며 “경찰이 이슈를 사건 자체보다 ‘검찰의 제식구 감싸기’ 논란으로 몰고 가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고 말했다.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윤용규 교수는 “경찰은 범죄사실이 객관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개수사를 했다는 게 문제”라며 “이는 필연적으로 명예훼손과 사생활 침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