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현미] 욕망해도 괜찮아
입력 2013-04-14 18:56
새벽에 갑작스런 복통으로 아픈 배를 쓸어안고 응급실을 찾았다가 그 길로 맹장 수술까지 한 경험이 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갑작스런 통증에 대한 뇌의 과장된 반응이었을 테지만 진짜 이러다 죽는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날 새벽에 느꼈던 복통으로 인한 공포를 다시 생각하면 고화질 DVD 영화를 재생하는 것처럼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수술 직전까지의 공포는 생생한데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하고 난 후의 회복 과정은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느꼈던 공포에 비해 수술 후의 회복은 죽을 것만 같던 그 공포가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버렸던 모양이다.
사십대에 들어서서인지 요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다. 주말에는 맹장 수술한 선배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어쩌다 문단 술자리에서 만나 새벽까지 술을 마실 때면 그 많은 애주가 무리들을 다 대적하고 늘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선배였다. 한마디로 전설적인 술꾼들, 수주 변영로와 시인 김수영에 버금갈 정도의 ‘주당’이랄까. 술로 인한 기행담이 많았던 수주, 김수영과 달리 선배는 그러고도 자세 한 번 흐트러짐 없이 술자리가 파하고 집으로 갈 때는 치기와 욕망을 제대로 다스릴 줄 몰라 취기를 빌려 ‘지랄’을 발산하고 일찍부터 취해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나를 같은 방향이라고 챙겨서 집 앞에 떨어뜨려주고 가곤 했다.
그런 일이 종종 있었으나 선배는 ‘여자가 그렇게 정신도 못 차리게 술을 마시면 되냐’는, 아무나 하던 잔소리를 단 한 번도 내게 하지 않았었다. 그런 선배가 입원을 했으니 내 경험상 아무리 가벼운 수술이었다고 해도 가보는 게 인지상정.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학교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 2006년부터는 8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셔왔다는 선배의 맹장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8년 동안 매일매일 마셔온 술 때문에 이 기회에 다른 장기들도 살펴보자고 해서 6일째 금식을 하고 있었다. 물도 마시면 안 된다는 선배는 생수병을 들고 말한다. 입에 넣을 수는 있는데 삼킬 수는 없어. 삼키면 치명적일 수도 있으니깐. 그러면서 그동안 너무 많이 삼켰기 때문에 병든 게 아닌가 싶단다. 욕망해도 괜찮은데 욕망한다고 다 삼켜버리면 병이 찾아오는 것 같단다.
그런 선배에게 “욕망해도 괜찮아? 그럼 퇴원하면 정신 못 차리게 술이나 한잔 하자”고 농담을 건네고 돌아왔다.
안현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