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한솥밥 눈빛으로 축구하죠”
입력 2013-04-14 16:54
포항 돌풍 원동력 ‘유스시스템’ 분석
“이번 시즌엔 외국인 선수 없이 세 마리 토끼(K리그 클래식·FA컵·AFC 챔피언스리그)를 쫓겠다.” 프로축구 황선홍 포항 스틸러스 감독의 말에 사람들은 다들 코웃음을 쳤다. 외국인 선수들이 팀 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K리그 클래식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항은 15일 현재 K리그 클래식에서 2위(3승3무·승점 12)에 올라 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에서도 조 2위(1승3무·승점 6)로 선전하고 있다. ‘토종 군단’ 포항의 돌풍 원동력은 바로 유소년 클럽 육성 시스템(유스 시스템)이다. 이번 시즌 포항의 전체 선수 32명 중 15명이 포항 유스팀 출신이다.
◇돋보이는 ‘쇄국축구’=황 감독은 모기업인 포스코의 재정난으로 외국인 선수를 쓸 수 없게 되자 이번 시즌 개막 전 “국내 선수들만으로 팀을 꾸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팬들은 황 감독을 ‘황선대원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황 감독을 19세기 말 쇄국정책으로 부국강병을 꾀한 흥선대원군에 빗댄 것. 황 감독은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지 못한 것”이라며 포항을 ‘쇄국축구’로 몰아가는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황 감독은 특급 외국인 선수들을 데리고 있는 다른 팀들을 부러워하는 대신 현실을 직시했다. 특급 외국인 선수가 없으니 믿을 건 조직력밖에 없었다. 황 감독은 지난겨울 터키 안탈리아 전지훈련 때 희망을 봤다. 연습경기에서 ‘토종군단’ 포항이 크로아티아 챔피언 디나모 자그레브(2대 1 승), 세르비아 챔피언 FK 파르티잔(3대 1 승) 그리고 폴란드의 FC 포곤(4대 0) 등 동유럽 강팀들을 연파한 것.
토종의 힘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황 감독은 지난달 13일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강호’ 분요드코르와의 AFC 챔피언스리그 G조 예선 2차전 때 어린 1.8군 선수들을 데리고 갔다. 빡빡한 K리그 클래식 일정 때문이었다. 이날 경기를 뛴 14명의 선수들 중 9명이 포항 유스팀 출신이었다. 포항은 유스팀에서 함께 뛰었던 이명주와 이광훈의 동점골과 추가골 덕분에 적지에서 2대 2로 비겨 소중한 승점 1점을 따냈다.
포항은 지난 2일 일본 히로시마 빅아치 스타디움에서 열린 3차전에선 히로시마 산프레체를 1대 0으로 꺾었다. 전반 18분 고무열의 땅볼 크로스를 배천석이 골로 연결했다. 고무열과 배천석은 둘 다 포항 유스팀 출신이다. 지난 10일 안방에서 치른 히로시마와의 4차전에서도 유스팀 출신의 황진성이 동점골을 터뜨려 1대 1로 비겼다.
포항 유스팀 출신들은 K리그 클래식에서도 맹활약하고 있다. 포항이 14일까지 K리그 클래식에서 기록한 골은 모두 11골. 이중 7골을 포항 유스팀 출신이 터뜨렸다.
◇키워드는 소통과 협력=포항 유스 시스템 출신 선수들은 황 감독이 추구하는 ‘조직력 축구’의 뿌리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한솥밥을 먹으며 운동했기 때문에 관계가 돈독하다. 지난 시즌 신인왕을 차지한 미드필더 이명주는 “고무열, 신진호 등 유스팀 출신 선수들과 예전부터 함께 호흡을 맞춰 왔기 때문에 이젠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명주는 두 해 선배인 미드필더 신진호에 대해 “라이벌이 아니라 콤비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소통과 협력. 이것이 유스팀 출신들의 장점이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FC 바르셀로나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축구 천재’ 리오넬 메시를 비롯해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 에르난데스 등 주축 선수 대부분이 ‘라 마시아(스페인어로 농장이란 뜻으로 바르셀로나 유소년팀의 별칭)’ 출신이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훈련하며 조직력을 다진 데다 개인기까지 훌륭해 바르셀로나를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포항에서 비유스팀 출신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진 않을까? 포항 선수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선수지원팀의 임정민 대리는 “유스팀 출신과 비유스팀 출신 사이에 갈등은 없다”며 “K리그 클래식에서 우리만큼 팀 분위기가 좋은 팀은 없는 것 같다”고 잘라 말했다.
일본 J리그 빗셀 고베에서 활약하다 지난해 12월 포항에 입단한 배천석은 “나도 유스팀 출신이긴 하지만 팀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입단하니 모두 잘 대해 줘 아무 문제 없이 팀에 녹아들 수 있었다. 이런 팀에서 뛰는 건 큰 행운이다”고 말했다.
포항 유스팀 출신들의 활약 뒤엔 비유스팀 출신들의 헌신이 있다. 유스팀 출신들이 최전방과 중원에서 마음 놓고 골 사냥을 하는 동안 비유스팀 출신의 수비수 김광석과 김원일은 든든하게 뒤를 받친다. 둘이 묵묵히 후방을 지키고 있기에 포항은 이번 시즌 ACL과 K리그 클래식을 통틀어 8실점(1득점)밖에 하지 않은 채 10경기 연속 무패로 순항하고 있다.
◇‘스틸타카’ 돌풍은 계속된다=“빨라졌다.” “재미있다.” 포항은 요즘 팬들에게 이런 얘기를 많이 듣는다. 바로 ‘스틸타카(스틸러스+티키타카)’ 때문이다. 황 감독은 티키타카(바르셀로나의 패스 축구를 뜻하는 말로 탁구공처럼 빠르고 짧은 패스가 이뤄진다는 뜻)처럼 빠른 축구를 선호한다. 황 감독은 예전부터 세 가지를 강조했다. 패스(Pass)와 균형(Balance) 그리고 속도(Speed)다.
황 감독은 자신의 축구 철학을 포항에 이식했고, 마침내 이번 시즌부터 서서히 꽃을 피우고 있다. 세밀하고 빠른 ‘템포축구’를 구사하는 황 감독은 “선수들에게 패스할 때 속도를 높이라고 주문을 많이 한다”며 “이명주, 신진호처럼 젊은 선수들이 많이 발전해 지난 시즌보다 발전된 축구를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포항에도 약점은 있다. 체력적인 부담과 골 결정력 부족이 그것이다. 포항은 지난달 30일 전남 전을 시작으로 3∼4일 간격으로 경기를 치르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선수들의 누적된 피로는 경기장에서 고스란히 문제로 드러났다. 지난 10일 히로시마 전에서 포항은 후반 들어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체력이 떨어지면 골 결정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날 포항은 8개의 슈팅 중 5개를 골문 안으로 보내고도 1골에 그쳤다.
아직 시즌 초반이다. 본격적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시점에선 현재와 같은 성적을 보장받지 못한다. 황 감독은 “골 결정력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체력적인 부분은 고민이 많다. 그렇지만 A, B플랜을 짜놨기 때문에 잘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