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바쁨’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 바빠지면 죽음의 현상이 나타난다. 임종을 앞둔 사람 곁에서 임종 간호를 하던 어떤 간호사의 말이다. ‘임종 간호를 하다보면 환자의 상태가 나빠질 때, 갑자기 모든 것이 빨라집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맥박과 호흡이 빨라지며, 의료진도 보호자도 정신없이 바빠집니다. 바빠지는 것은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바쁜 사람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현상은 몸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나타난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지듯, 바빠지면 마음도 차가워진다. 실제로 정신없이 바쁜 사람 옆에 가면 대부분 싸늘한 냉기가 느껴진다. 말을 걸 수도 없고, 따뜻한 온기를 느끼기도 어렵다. 그러고 보니 한자에 ‘바쁘다’는 뜻의 ‘망(忙)’자는 ‘마음(심)’과 ‘죽음(망)’을 합쳐놓은 말이다. 마음이 마치 죽은 시체처럼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바쁨’이며 ‘바쁠 망’자다. 바빠질수록 마음은 죽음과 가까워진다. ‘바쁨’과 ‘죽음’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기다리는 한 여성의 말이다. “너무들 바쁘지 마세요. 내가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매일 아이들을 꼭 안아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매일 밤늦게 돌아오는 남편을 환한 얼굴로 맞아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요.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행복했던 기억이 별로 없어요.” 너무도 가슴 아픈, 그러나 진솔한 고백이다. 바쁨과 죽음이 바로 연결되어 있음을 늘 기억하며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걸 알았다면, 혹 어쩔 수 없이 바쁠지라도 최소한 영혼에 빨간 경고등은 켜고 살지 않았을까? 경고등을 켜고 살았다면, 최소한 아이들을 마음 다해서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지는 않았을까? 남편에게 환한 표정을 선물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 교회의 정신없이 바쁜 40대 은행원 한 분이 내게 한 말이다. “목사님, 저는 출근할 때, 항상 한 정거장 전에서 지하철을 내려요. 그리고 직장까지 걸어가면서 하루의 삶을 위해 기도합니다.” 보통 내공이 아니다. 바쁨과 죽음의 관계를 꿰뚫어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닌가?
고침 받은 열 한센병 환자 중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광야에 계신 예수께 돌아왔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 갔는가? 그들은 바쁘게 제사장에게로 달렸다. 제사장 판정을 받고 다시 유대사회에 복귀하자니 마음이 바빴던 것이다. 그간 한센병으로 잃었던 것을 되찾으려니 급했다. 그러나 바쁠 필요가 없었던 한 사람, 사마리아인을 보라.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은 사회적 복귀를 해도 역시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약점이 그를 오히려 바쁨이라는 죽음의 덫을 피하여 예수께 오게 했다. 반대로 바빴던 아홉은 한센병은 피했지만, 바쁨이라는 죽음의 덫에 걸리고야 말았다. 예수의 구원 선언은 사마리아인, 한 사람에게만 떨어졌다. 바쁨이 두렵지 않은가? 바쁨은 죽음의 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자.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