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의승 (1) 20년간 농어촌교회 목회자들 돌봐온 까닭은?
입력 2013-04-14 17:15
지금 나는 농어촌 교회에서 목사님을 도와 사역하는 사모님 100여분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 중이다. 지난해 100여명의 작은 교회 목회자들과 함께 성지를 다니면서 나는 벅찬 느낌을 가졌다. 우양재단에서는 오래전부터 시골 교회 목회자들을 돕는 사역을 펼쳐왔다. 나는 십수년 동안 이들 목회자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성지 순례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성지 순례의 기회를 갖지 못한 목회자와 사모들에게 성지를 밟을 기회를 제공해 드리고 있다.
개인적으론 그동안 여러 차례 성지 순례를 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목사님들, 특히 시골교회 목회자들과 함께한 성지 순례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성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목사님들과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갈릴리 호수에서 선상예배를 드렸을 때, 우리는 12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주위를 다니면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느꼈다. 그 선상 예배의 경험이 앞으로 그들 목회에서 귀중한 자산이 되리라 믿는다.
농어촌 목회자들을 후원한 지도 올해로 20년이 됐다. 1993년부터 100명의 농어촌 목회자들에게 매달 선교비를 후원하면서부터 농어촌 목회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하늘 아래에서 인간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돈과 일꾼을 주셨다. 나에게 주어진 그 자원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사용할까를 생각했다. 그 생각 자체도 그분이 주신 것이다. 나는 오직 그분의 뜻이 흐르는 ‘통로’ 역할을 했을 뿐이다. 나는 주님 앞에서 ‘무익한 종’일 뿐이다.
평생 한 번 성지순례 기회를 갖지 못한 목회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난 작은 교회 목회자들을 돕는 것이 참으로 보람된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농어촌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담당하면서 묵묵히 목회하는 작은 교회 목사님들을 돕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큰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작은 교회’나 ‘시골 교회’란 단어를 접할 때마다 아련한 느낌을 갖는다. 그 단어에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노스탤지어가 있다. 나에겐 그 향수가 더 짙게 배어 있다. 그것은 내 평생 삶의 자양분이 된 것이 시골의 작디작은 교회에서 체득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강릉시 학산리 375번지, 내가 태어난 곳이다. 당시 아버님은 삼척(현 태백시)의 장성 광업소 내 한 병원의 스태프로 취업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유년기를 탄광촌인 삼척에서 보내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임지를 옮긴 아버님을 따라 동해시 묵호로 갔다. 거기서 6·25전쟁을 맞았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6·25가 발생하자 할아버지가 나를 태백시 금천리로 옮겼다. 정감록 신봉자셨던 할아버지가 금천리에는 무두귀(無頭鬼·칼로 목이 베어져 머리가 없는 귀신)나 아사귀(餓死鬼·굶어죽은 귀신)가 없다면서 전쟁이 끝날 때가지 나를 거기 머물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6학년 2학기까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렵사리 초등학교는 졸업할 수 있었다.
◇약력 △1939년 강원도 강릉 학산 출생 △강원도 동해시 북평고등학교 졸업, 서울대 생물학과 입학 △해군사관학교 17기 △월남전 참전 △1977년 중령으로 전역 △MTU한국지사장 △학산실업주식회사 사장 △유비엠텍 창업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이사장 △우양재단 이사장 △서울 성산동 열림교회 장로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