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핥기와 비슷하게 생긴 천산갑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열대지방에 서식하는 야행성 동물로 멸종위기종이다. 그런데 유럽의 한 동물원에서 천산갑이 아무 이유 없이 죽은 채 발견된 적이 있다. 수의사의 검사 결과 사인은 탈수. 먹이와 물이 매일 공급되는 동물원에서 탈수로 죽었으니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곧 진짜 이유가 밝혀졌다. 천산갑에게 탈수 증상을 일으키게 한 범인은 바로 신입 사육사였다. 경험이 부족했던 그 사육사는 천산갑이 표시를 위해 소변을 볼 때마다 즉시 깔끔하게 청소해버렸던 것. 영역 표시 본능이 강한 천산갑은 그때마다 쉼 없이 소변을 봐야 했고, 결국 체내의 수분을 모두 소진해 쓰러졌던 것이다.
이처럼 배설물 냄새로 자기 영역을 표시하는 것을 동물생태학에서 ‘센트 마크(scent mark)’라고 한다. 냄새로 나타내는 영역 표시라는 의미다. 영역 집착이 아주 강한 하이에나는 센트 마크에 사용하는 2개의 냄새샘이 항문에 달려 있을 정도다.
인간에게서도 영역 본능을 발견할 수 있다. 좌석이 텅 빈 지하철에 가장 먼저 탄 사람은 양 끝자리에 앉곤 한다. 한쪽 옆에 앉는 사람이 없어 영역 확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R 조마라는 학자의 실험에 의하면 도서관에 자리가 많이 있음에도 새로 온 사람이 어떤 사람의 곁에 앉을 경우 그 사람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버리는 확률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
같은 동물 종끼리의 공격 행위는 대부분 영역 싸움에서 비롯된다. 동물에게 영역은 번식의 터전이자 생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역 다툼에도 그들만의 지혜와 규칙이 존재한다. 대서양 서안의 맹그로브 숲에는 평소 영역 다툼이 심한 맹그로브 킬리피시라는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이 물고기들은 건기가 되면 습기가 많은 나무 구멍으로 옮겨가 우기가 될 때까지 좁은 공간에서 여러 마리가 함께 몇 달씩 생존해야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때만큼은 서로 영역 싸움을 하지 않고 최대한 인내하며 공존하는 특성을 보인다.
갈라파고스 제도 화산암에 사는 바다이구아나는 짝짓기 철만 되면 수컷들이 일정 면적을 자기 영역으로 선언하고 침범하는 다른 수컷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그런데 이 싸움에는 매우 중요한 규칙이 있다. 상대방을 절대로 이빨로 물지 않는다는 것. 바다이구아나는 삼각형의 날카로운 이빨이 있어 깨물 경우 쌍방 모두 심각한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규 (과학 칼럼니스트)
[사이언스 토크] 영역 다툼의 규칙
입력 2013-04-12 1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