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차정식] 적극적 상호주의가 해답이다

입력 2013-04-11 19:05


북한의 일방적인 개성공단 폐쇄 조치로 가파르게 치닫던 남북 간 긴장관계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남북 갈등이야 해묵은 문제이지만 지금처럼 꽉 막힌 불통 상태도 드물었다. 북측이 전쟁 분위기를 띄우며 남한과 미국을 압박하는 적대적인 위기 국면이 예사롭지 않다. 핵무기와 미사일로 남한을 겁박하려는 북측의 수작에 밀리면 현 정부 내내 계속 끌려다닐 것이라는 계산 아래 우리 쪽도 선뜻 대화에 나설 뜻이 없어 보인다. 일단 도발하면 몇 배로 응징하겠노라며 팽팽한 기세다.

엉키는 건 쉬운데 풀기는 힘들다. 불통 상황은 비단 남북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청와대와 국회, 여당과 야당, 심지어는 범여권 진영 내에서 당·정·청의 소통 수준도 민망할 정도로 겉돌고 있다. 인사 파동의 후유증과 ‘창조경제’의 개념 혼선으로 점점 더 지리멸렬해가는 형국이다. 아무리 적대적인 전선을 형성하고 있더라도 대화는 지속되어야 한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상호 간의 소통 채널은 늘 열려 있는 법이다.

먼저 善待하는 지혜 필요해

상황을 방치한 채 우연에 맡겨버리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 우발적인 충동이란 변수가 작용하는 남북관계에서 서로 감정을 긁어대고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이판사판식의 불행한 재난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해법이 없는 건 아니다. 예수의 황금률은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 실천적 지혜로 숙고할 만하다. 원문의 뜻을 직역하면 이렇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너희들 또한 그와 같이 그들에게 해주어라.”

여기서 예수는 무엇이든 좋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세계의 기본 욕망을 꿰뚫어 보았다. 그런데 남들이 자기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기가 먼저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모험이기에 적극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남들을 먼저 선대한다고 그들이 자신을 똑같이 선대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악독한 부류도 있다. 그 현실을 무릅쓰면서 예수의 황금률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들에게 하지 말라’는 식의 소극적 상호주의를 넘어 적극적 상호주의를 추구한다. 그것은 담백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열정의 소산이다. 손해 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선수 치면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정공법의 자세다.

실익을 따지는 치밀한 전략 전술도 필요하겠지만 예수가 제시한 황금률의 방식이 고단수의 대화 전략이고 고밀도의 소통 전술이다. 그것은 서로 원수가 되어 팽팽하게 대치하다가도 일순간 무장해제하듯 먼저 상대방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려는 정치 이상의 정치이며 외교 이상의 외교다. 서로 물고 뜯고 싸우려고 대들다 보면 그 극한대치 상황은 막가는 증오와 저주, 참혹한 살육으로 종결될 뿐이다. 에누리 없이 동시에 주고받는 기계적인 상호주의의 인간관계란 없다. 인간은 여백의 존재일망정 그런 차가운 기계가 아니다.

황금률은 언제나 적용된다

이런 황금률의 역설적 이치가 대치전선으로 치닫는 남북관계에 서둘러 적용되면 좋겠다. 양보 없는 갈등으로 지쳐가는 한반도의 정치와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먼저 초청하고 인정하며 선대해보자. 다시 얼굴을 맞대고 역지사지의 자세로 진지하게 대화하고 담백하게 소통하려는 수뇌부의 결단이 절박하다.

내남이 두루 싫어하는 것을 회피하는 소극적 상호주의도 필요하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꿀리는 상대방이 아쉬워하는 점을 대변해주고 가려워하는 구석을 먼저 시원하게 긁어주자. 그러면 이미 꺼져버린 신뢰의 불씨도 다시 지필 수 있지 않을까. 악독한 사람이 늘 이기는 것 같지만 더 오래 참고 관대한 쪽이 결국 최종 승자가 된다. 황금률의 적극적 상호주의가 해답이다.

차정식 한일장신대 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