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선생님의 트라우마

입력 2013-04-11 19:05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했었다. 동료 교사들이 모조리 여대 출신인 바람에 난이도 10점 만점에 10점인 초등학교 4학년 남자팀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과외선생쯤은 노리개 잡듯 쥐고 흔드는 아이들 앞에서 꼬꾸라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던 날들. 열 살짜리 아이에게 돈값하고 가라는 독한 말을 듣고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내려고 눈 부릅뜨고 창밖을 내다보며 숨 고르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속이 쓰리다. 한동안 그 동네를 지나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러다 보니 2년차가 되었을 때는 콩알탄 100개를 한꺼번에 던져도 눈 하나 깜짝 안할 만큼 강단이 세어졌고 어머니들이 단체로 몰려와도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문 닫고 돌아서서 터덜터덜 걷다 보면 가슴이 불에 덴 것 마냥 쓰리고 서러웠다.

가장 답답하고 어려웠던 것은 부모가 자기 아이를 너무 모른다는 것. 대부분 경우가 그랬다. 아이가 쓴 글과 수업시간의 언행을 부모에게 전했을 때 열에 아홉은 ‘그럴 리가요. 우리 애는 그런 애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하거나 ‘아이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가볍게 넘긴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서부터가 나쁜 짓인지 아이들 스스로의 판단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다. 그러니 내 아이도 언제든지 ‘그런 애’가 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의 경계를 분명히 세워줘야 한다.

한 초등학교 여학생이 선생님을 속이고 1년 동안 양변기의 물을 먹게 했다는 기사를 봤다. 트라우마가 생긴 선생님은 휴직을 했다는데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해코지하려고 작심하고 그랬겠는가 싶으면서도 1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충격적이다. 대체 무슨 마음으로 계속했을까. 노여움과 걱정이 반반이다.

어린이는 미완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 사회적 약자라 한다. 그러나 때론 그 미완의 인격체가 어른의 삶에 큰 생채기를 남길 정도로 잔인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사랑이라 믿는 속없는 부모들이 존재한다. ‘설마 내 아이가’ 하다가는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엔 아이도 잡는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아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보기만 해도 아픈 흉터가 될 수도 있다. 두 눈 뜨고도 자식 사랑에 눈먼 장님이 되지 말아 달라고, 감히 부탁하고 싶다.

김희성 (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