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에도 지상에 남게 된 영혼을 위하여
입력 2013-04-11 17:10
배수아(48)의 거의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스토리라인을 따라잡으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그가 독일 유학 이후 2000년대에 실험하고 있는 게 비서사적 소설 양식이기 때문이다. 2년 전, 장편 ‘서울의 낮은 언덕들’에서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직업인 낭송극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목소리들’이 소설화되는 과정을 보여준 그가 신작 장편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자음과모음)을 들고 나타났다. 말 그대로 현실이 꿈으로 전이돼 그 안에서 독자적인 구조로 순환되는 ‘꿈의 무한 건축법’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 시대 환영의 출처를 드러내 보인다.
소설엔 폐관을 앞둔 서울의 유일무이한 오디오 극장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스물아홉 살 ‘아야미’가 등장한다. 아야미와 그가 만나는 사람들, 이를테면 암에 걸린 독일어 선생 여니, 극장의 폐관으로 아야미처럼 실업자 신세가 된 극장장, 소설을 쓰러 난생 처음 서울을 방문한 독일 시인 볼피 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표면적 중심이지만, 이 소설은 시(詩) 혹은 시적 순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1년에 단 한 번 있는 극장의 여름철 휴가 때 아야미가 더위를 식히려고 욕조에 들어가 몸을 담고 있는 장면은 이렇게 변주된다. “꿈속에서 아야미는 가슴에 커다란 앵무새를 안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차가운 물이 담긴 욕조 속으로 기어들어가 잠들곤 했다. 앵무새가 그녀의 가슴을 발톱으로 파면서 아주 크고 길게 소의 울음소리를 냈다.”(24쪽)
아야미가 극장 현관 유리문 밖에서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다가서는 감정은 이렇게 변주된다. “그녀는 매우 강렬하면서도 정체불명인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는 자신의 육체를 느꼈다. 의지와 의식을 넘어서는 감정. 나는 감정이다, 하고 그녀의 무엇인가가 그녀를 대신하여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나는 오직 감정이다.”(34쪽)
굳이 소설의 주제를 밝히자면 ‘나는 오직 감정이다’라는 구절일 텐데 그 상태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문학 장르가 시인 것이다. 배수아는 시적 순간의 빛, 혹은 순간의 영감이 없다면 이 기나긴 인생은 얼마나 무료한가 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야미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이런 순간의 빛은 반짝인다.
“아야미는 미래의 아야미 혹은 과거의 아야미였다. 또는 동시에 존재하는 둘 다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아야미는 닭이고 노파였다. 그것은 동시에 존재하는 밤과 하루의 비밀이었다. 아야미는 단 한 번의 몸짓으로 그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자신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바람에,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69쪽)
4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뒤엉킨 그물과도 같아서 책을 펼친 독자들이 길을 잃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여니’는 극장장이 아야미에게 소개시켜준 독일어 선생이자, 오디오 극장의 마지막 공연인 ‘눈먼 부엉이’ 낭독자이기도 하다. 또한 독일 시인 볼피가 만나기로 예정됐던 여자이자, 어디선가 반복적으로 걸려오는 전화에 대고 아야미가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 반복되고 변형되는 여니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의 형식 자체인 ‘하나인 동시에 모든 것’을 들려주려는 내적 구조와 닮아 있다. 아야미는 여니에 의해 ‘눈먼 부엉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그 별명은 오디오 극장의 마지막 공연 이름이자 이 소설이 지향하는 형이상학, 즉 ‘눈이 없어도 보이는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지칭인 동시에 ‘사물의 죽음 이후에도 지상에 남아 있게 된 영혼’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건 ‘눈먼 부엉이’에 대한 오독일지도 모른다. 읽는 사람에 따라 소설의 의미는 얼마든지 변주될 테니까. 그러니 ‘눈먼 부엉이’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소설 안에서 길을 잃거나 혹은 길 위에서 영원히 머물기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