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재미 본 출판가 이번엔 ‘행복’에 꽂혔다

입력 2013-04-11 17:25


이른바 ‘행복서(書)’들이 쏟아진다.

최근 두어 주 사이에 책 제목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신간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한 주에 2, 3권꼴로 나오는 모양새다.

우연의 일치를 넘어 출판사들이 의도적인 제목 장사에 나선 게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다. ‘국민행복시대’를 내건 박근혜 정부가 행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정책 상품을 계속 만들어내는 상황과 묘하게 맞물려 흥미롭다. 출판계의 ‘행복 마케팅’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11일 출판계에 따르면 최근 출간된 행복서는 ‘합리적 행복’ ‘행복을 꿈꾸는 보수주의자’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 ‘행복에 이르는 일곱 고개’ ‘행복해지는 방법’ ‘사오정 넘고 오륙도 돌아 행복 공동체로’ ‘나눔, 행복한 동행’ ‘가족과 함께한 행복한 독서여행’ 등이 있다. 번역서와 국내서를 아우르며 주로 자기계발서나 에세이에 ‘행복서’가 많다.

◇왜 행복서 출간이 잇따를까=행복서 출판이 유행하게 된 경로는 두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우선 지난 2월 KBS 2TV 북 토크 프로그램 ‘달빛 프린스’에서 소개된 프랑스 소설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의 인기 편승이다. 이 책은 당시 높은 시청률로 국민 프로그램이 된 주말드라마 ‘내 딸 서영이’의 주인공 이보영이 추천했다. 2004년 출간됐다가 이내 사그라진 이 책은 인기가 갑자기 폭발했다. 각종 온오프라인 서점 집계에서 3월 둘째 주(8∼14일)부터는 28주간 연속 정상을 지켰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누르고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고 있다.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은 정신과 의사가 행복의 참된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내용을 소설 형식에 담았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 얼마나 가졌는지 돌아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또 하나는 박근혜 정부가 ‘행복’을 시대적 용어로 만든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새 정부 들어 추진된 핵심 정책 중 연체자 빚 탕감 프로그램은 ‘국민행복기금’으로, 저소득층 임대주택은 ‘행복주택’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국민행복시대를 기치로 내건 만큼 정부 정체성 홍보를 위한 ‘조어 정치’로 볼 수 있다.

◇출판사들 “우리는 유행이 좋다”=출판사는 제목에 민감하다. 팔린다 싶은 제목이 있으면 너도나도 따라 한다. 한때 딱딱한 인문 과학서에 경쾌함과 친근감을 주는 ‘철학 콘서트’ ‘경제학 콘서트’ ‘과학 콘서트’ 등 ‘○○ 콘서트’ 류의 책들이 크게 유행했고, 지난해 중년들의 불안과 피로를 반영해 ‘40대’를 제목으로 내세운 책들이 대거 나와 인기를 끈 것이 좋은 예다.

제목뿐 아니라 책의 유형에도 트렌드가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에는 ‘파워포인트 활용법’ 등 직장 내 생존에 도움이 되는 직접적인 실용서가 인기를 끌었다. 경기침체와 경쟁이 상시화되면서 심리적 안정을 강조하거나 ‘느리게’를 주창하는 책이 반향을 일으켰다. 이런 책의 정점에 있는 것이 힐링서의 패자(覇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행복 뒤에 숨은 시대의 욕구는?=행복서 역시 지난해 거세게 분 힐링 열풍의 연장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다만 새것 같은 느낌이 들게 새 단어로 갈아입힌 힐링서라는 것이다.

출판평론가 장동석씨는 “한 단어를 계속 쓰면 식상하기 때문에 출판사들이 단어를 살짝살짝 바꿔 가는 것”이라며 “행복이라는 어감에는 안정감이 있고, 자기 만족감과 충족감을 줄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지금 시대가 행복하지 않으니까 행복이 먹혀드는 측면이 있을 것”이라며 역설적 표현으로 해석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했다. 그는 신간 ‘합리적 행복’이 요즘 사회 분위기를 요약해준다면서 “누구라도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을 꿀 때는 자기계발서가 인기다. 하지만 갈수록 성공이 멀어지자 자신의 꿈을 최대한 좁혀놓고 그것이라도 이루면 다행이라는 식의 소극적 행복론이 먹혀들고 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냉소적 행복론이라는 것이다.

정권에 대한 역설적 주문도 있다. ‘행복을 꿈꾸는 보수주의자’를 펴낸 피플트리의 박종인 편집장은 “우리도 보수가 집권했지만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성장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며 “공존을 주장하고 실천했던 독일 보수정치가를 내세워 진짜 보수주의자는 따뜻해야 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행복+보수’ 조합을 갖춘 이 책을 번역 출간하게 됐다”고 말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