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과 갈대로 빚은 ‘지구의 정원’ 순천만
입력 2013-04-10 17:18
국제정원박람회 열리는 순천만의 하루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보면서 걷는 ‘상생의 길’이 있다. 전남 순천의 구석구석을 걸어서 여행하는 남도삼백리길 중 제1코스인 순천만갈대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국제정원박람회 무대이자 ‘지구의 정원’으로 거듭난 U자 형태의 순천만을 따라 걷는 순천만갈대길의 출발점은 별량면의 화포마을.
아담한 갯마을인 화포(花浦)는 꽃이 피는 포구라는 뜻. 마을 뒷산인 봉화산이 그리는 촘촘한 등고선 사이로 철따라 형형색색의 들꽃이 짙은 꽃향기와 갯내음을 함께 품고 있다. 꽃등으로 불리는 선착장 옆의 낮은 언덕도 이름값을 하느라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순천만 서쪽에 위치한 화포마을에는 아침마다 피는 꽃이 하나 더 있다. 바다 건너 해룡면 앵무산에서 해가 솟으면 동백꽃보다 붉게 물드는 순천만이 바로 그 꽃이다. 갈대숲에서 단잠을 잔 새들은 붉은 색도화지 속에서 짱뚱어와 농게 등 먹잇감을 찾느라 분주하고, 부지런한 어부들은 거미줄처럼 쳐놓은 그물을 걷느라 바쁘다.
화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1㎞ 정도 걸으면 바닷가 언덕 아래에 위치한 우명마을. V자 형태로 설치한 수많은 그물과 제멋대로 꽂혀 있는 말뚝의 실루엣이 반영과 어우러져 기묘한 풍경을 그린다. 순천만갈대길은 우명마을에서 가파른 언덕을 올라 봉화산 중턱을 달리는 도로에 올라선다.
순천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도로는 곳곳이 전망 포인트. 드넓은 순천만과 바다 건너 갯마을들, 미스터리 서클을 닮은 원형의 크고 작은 갈대밭, 그리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갯고랑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그린다.
갯벌체험장이 있는 장산마을에서 다시 순천만으로 되돌아온 순천만갈대길은 둑길과 이웃한 대대들판을 벗한다. 대대들판은 갈대밭과 함께 철새들의 은신처이자 보금자리. 겨울에는 흑두루미를 비롯해 검은머리갈매기, 청둥오리, 혹부리오리, 민물도요, 가창오리, 큰고니, 노랑부리저어새 등 230여종 수만 마리의 철새가 날아들어 새들의 천국을 건설한다.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흑두루미는 순천만을 찾는 겨울 진객 중 으뜸. 4000만 년 전 공룡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흑두루미의 월동을 위해 순천시가 내륙습지를 복원하고 비행에 방해가 되는 전봇대 282개를 뽑는 등 생태환경을 개선해 해마다 순천만을 찾는 철새들이 늘어나고 있다.
길은 동천과 이사천이 합류하는 대대포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에서 ‘안개나루(霧津)’라고 명명한 대대포구는 안개가 많은 지역으로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소리 없이 찾아와 단숨에 세상을 삼키고 토해내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대대포구의 무진교를 건너고 누렇게 탈색한 갈대밭 사이로 난 목교를 지그재그로 걷다보면 길은 어느새 야트막한 용산을 오른다. 용산은 산줄기가 용이 누워있는 모습을 닮아 붙여진 이름. 산마루의 용산전망대에 서면 물 빠진 갯벌을 수놓은 S자 수로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원형의 갈대밭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진풍경을 만난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에 둘러싸인 항아리 모양의 순천만은 산과 강, 바다와 섬, 논과 갯벌 등 한국의 정겨운 자연을 한곳에 모아놓은 한반도의 축소판이다. 여기에 도시와 포구, 철새와 갈대, 해돋이와 해넘이, 안개와 바람이 어우러져 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8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순천만은 몇 차례에 걸친 간척사업으로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갈대밭과 칠면초 군락지, 갯벌 등 염습지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생명의 땅이다. 14㎞에 이르는 순천만갈대길이 도보여행길이자 생태교과서롤 각광을 받는 이유다.
70만평의 갈대밭과 800만평의 갯벌로 이루어진 순천만은 세계 5대 연안습지. 희귀 동식물이 공존하는 생명의 땅으로 2006년에 우리나라 연안습지 가운데 처음으로 람사르 협약에 등록됐다. 오는 20일부터는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려 한국을 대표하는 생태관광지로 명성을 더하게 됐다.
용산전망대에서 만나는 갈대밭은 사철 색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봄에는 원형 갈대밭과 염생식물인 칠면초가 연두색 새싹을 틔운다. 여름이 오면 갈대밭은 초록색으로, 칠면초는 붉은색으로 변한다. 순천만의 풍경은 가을을 으뜸으로 꼽는다. 하얀 갈꽃이 햇살에 젖어 황금색으로 빛나는 황금들녘은 순천만을 대표하는 풍경.
용산전망대에서 하산한 순천만갈대길은 폐염전과 칠면초 군락지로 유명한 구동마을과 노월마을 등 정겨운 포구마을을 만난다. 노월마을의 전망대 앞 갯벌은 순천만을 생활터전으로 하는 아낙들이 널을 타고 꼬막이나 맛 등 조개를 잡으러 가는 곳. 이른 아침 수십 명의 아낙들이 널을 타고 물 빠진 갯벌로 나가는 장면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풍경.
순천만갈대길의 종착지는 화포마을 맞은편에 위치한 해룡면의 와온마을. 마을 뒷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인데다 산 아래로 따뜻한 물이 흐른다는 ‘와온(臥溫)’은 해넘이가 아름다운 갯마을이다. 마을 앞에 위치한 사기도는 학섬, 똥섬, 애기솔섬 등으로 불리는 철새들의 쉼터로 해질녘 실루엣이 황홀하다.
원형의 갈대밭이 검은 점으로 변해 어둠 속으로 침잠하면 새들도 갈대밭에서 고단한 날개를 접는다. 이어 와온, 화포, 장산, 우명 등 갯마을들이 별빛처럼 희미한 등불을 밝힌다. 곽재구 시인이 ‘하늘의 별과 순천만 갯마을들의 불빛들을 차례로 바라보며 나는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하는 싱거운 생각에도 잠겨본다’고 한 바로 그 순간이다.
순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