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레프 도진 “극장은 내면 찾는 마지막 공간”
입력 2013-04-09 18:07
세계적인 무용 안무가와 연극 연출가가 나란히 방한했다. ‘현대무용의 전설’로 불리는 미국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와 ‘러시아의 국보급 연출가’ 레프 도진이 그 주인공이다. 고전 레퍼토리만 반복하는 발레계에 포사이스는 혁신적인 안무로 21세기 춤의 방향을 제시한다. 감탄은 있지만 감동은 없는 현대 연극계에 도진의 연극은 감동을 선사한다. 각각 자신의 대표작 ‘헤테로토피아’(낯선, 다양한, 혼종된 공간이라는 의미)와 러시아 문호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를 들고 내한한 두 거장을 만났다.
“기술의 정글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극장은 스스로의 내면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공간이다.”
러시아의 국보급 연출가 레프 도진(69)의 말에는 한평생을 연극에 바친 예술가의 신념이 배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의 예술감독인 그는 러시아인 최초로 세계 권위의 유럽연극상을 받은 현대 최고 연출가로 꼽힌다.
그의 연출작 ‘세 자매’가 올려지는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9일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그가 선보이는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세 자매’는 러시아 지방 소도시에 사는 세 자매의 사랑과 배신, 좌절을 그린 작품이다. 말리 극장 배우 19명이 함께 내한해 러시아어로 공연되며 한글 자막이 제공된다. 단순한 무대에서 오로지 텍스트 해석과 배우 연기에 초점을 맞추는 연출이 특징이다.
도진은 “‘세 자매’는 체호프 작품 가운데 가장 복잡한 연극이다. 체호프의 연극에 나오는 인물은 지루하고 나태하고 삶의 의욕이 없다는 편견이 있는데 이를 깨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짧은 생을 살았다. 유능한 의사였고 작가였다. 일찌감치 자기의 죽음을 알고 있었기에 삶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체호프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깊은 고뇌를 했고, 이런 생각 끝에 각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작가를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다. 삶과 죽음은 보편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다.”
좋은 연극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 삶이 점점 더 이성적으로 변하고 있다.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 굉장히 힘들어지고 있다. 타인에 대해 배려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연극을 통해 관객들이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다른 이도 나와 똑같은 감정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통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게 바로 좋은 연극의 역할이다.”
그는 이어 “최근 들어 연극들이 이런 의무를 외면하는 것 같다.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자극적인 공연을 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 오히려 이런 시기일수록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연극에 젊은 관객이 많이 찾아오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도진은 “나는 체호프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늘 작품을 하면서 그와 대화한다. 설령 그가 살아있다 할지라도 내 질문에 더 많은 답을 줄 것 같진 않다. 체호프는 유머러스했고, 진지하고 심오한 질문을 싫어했다. 아마 내가 ‘세 자매’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한다면 ‘그거 하나도 안 중요해’라고 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연극 ‘세 자매’ 공연은 10∼12일.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