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기증, 희망의 씨앗을 뿌려주세요] ③ 생명의 빛을 선물합시다

입력 2013-04-09 18:08


생명나눔은 의무 이전에 축복이자 선물

구약성서의 창조기사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을 관계 안으로 창조했다. 하나님은 홀로 있는 아담의 모습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그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심으로써 인간의 창조를 완성했다. 여기서 갈빗대의 메타포는 서로 도와서 한 몸을 이루는 관계적 인간성을 의미한다.

홀로 있는 아담이 불완전하듯 관계를 떠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나와 이웃은 서로에게 속한 존재이며 서로 돕는 관계를 떠날 수 없다. 이웃은 나의 존재의 목적이다. 이것이 바로 영생하도록 창조된 인간의 본래적 모습이다.

예수는 이러한 인간의 피조성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 그는 비유를 통해 인간이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영생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그것을 받은 자만이 전해줄 수 있고, 전해주지 않으면 사라져 버린다(요일 4:7). 그리고 그것은 주면 줄수록 더욱 풍성해진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강도 만난 이웃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하는 자만이 아파할 수 있고 아파하는 자만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이웃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 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의무이기 이전에 우리를 향한 축복이요 선물이다.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복음 아래 있는 존재다. 그에게는 악을 행하는 것 뿐 아니라 선을 실천하지 않는 것도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는 사랑의 실천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위한 소금이고 이웃을 향한 빛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위기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사랑하셨다. 그 고난 가운데 나타난 사랑만이 이웃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시킨다. 불신앙이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이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축복은 소유하는 것보다 나누는 것에 있다. 인간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다. 우리의 생명 또한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나의 생명뿐 아니라 이웃의 생명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나와 이웃의 생명은 서로 연결돼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함께 지켜가야 하는 ‘생명의 청지기’다.

생명나눔운동은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실천이며 영생의 실천이다. 그것은 나와 이웃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지체들임을 경험하는 축복의 통로다. 장기기증은 성만찬의 신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누어져서 서로 나누어진 우리가 하나로 연합된 것처럼 우리의 삶이 세상에서 이웃을 위해 나누어질 때, 주님의 성찬은 우리 안에 성취되는 것이다.

생명나눔운동이 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부활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성서는 생명을 육체적 생명, 보이는 생명을 의미하는 ‘비오스(Bios)’와 영원한 생명, 보이지 않는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Zoe)’로 구분한다. 부활이란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적 생명을 회복해 소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소생이 아니라 사망권세를 이기신 것이며, 죽음으로부터의 영원한 승리를 의미한다. 그 승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의 한복판에서 실현됐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육체적인 죽음과 상관없이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요11;25-26).

협성대 홍순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