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운식 (8) ‘신군부 압박’ 등 한국 여행산업의 모든 것 체험

입력 2013-04-09 17:19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우리나라 여행산업의 태동과 성장과정, 절정기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감격스런 역사적 장면들도 많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한항공(KAL)의 파리 첫 취항이었다.

1975년 미국에서 제작한 최신형 비행기 DC-10기를 타고 파리로 향했다. 대한항공이 파리에 처음 취항하면서 미국산 최신 비행기를 도입했고 첫 비행에 여행산업 관계자들을 초청했기 때문이다. 샵항공에 근무할 때 이미 네덜란드 헤이그이 KLM 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기에 첫 유럽방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적기를 타고 파리를 방문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대한항공의 파리 취항은 서울항공에도 큰 기회였다. 유럽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최신형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가는 동안에도 나는 훗날 우리나라 최초로 유레일 패스 한국총판이 될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파리행 비행기에는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과 7∼8명의 여행사 관계자, 다수의 연기자와 시립무용단, 사물놀이팀, 언론인이 동행했다. 비행시간 내내 우리는 희극배우들의 재치 있는 입담과 여러 예술인들의 재주를 보고 들으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비행기 창문으로 파리 오를리(ORLY) 국제공항의 활주로가 보이자 비행기 안은 온통 “대한민국 만세”를 연창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감격에 찬 일부 승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국적기가 파리에 첫 기착한 것이다.

1980년대 초 생명의 위협 속에 맡은 직책을 포기했던 일도 있었다. 당시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언론통폐합과 함께 여행업 통폐합도 실시됐다. 당시 나는 한국항공운송대리점협회 회장직을 연임 중이었는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호출을 받고 삼청동 사무실에 불려갔다.

지금 생각해도 손발이 떨리는 일이었다. 옆구리에 권총을 찬 국보위 소속 중령은 내게 한국항공운송대리점협회 회장직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게 했다. 당시 여행업계에는 국내여행을 담당하는 국제여행알선업협회와 해외여행을 맡은 한국항공운송대리점협회가 각각의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신군부는 두 협회를 폐지하고 한국관광협회 안에 새로운 위원회로 통합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포기각서를 쓰고 나오는 길에 나는 속으로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제 막 한국 여행산업이 성장하려는 시점인데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강제로 빼앗긴 것 같아 참으로 서러웠다. 하지만 미래를 기약하며 삼청동을 터벅터벅 걸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1988년 대한민국 제2의 민간 항공사 아시아나항공이 창립된 것도 여행업계 종사자에게는 남다른 감격이었다. 1970년대부터 세계를 오가며 선진국일수록 다수의 항공사가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차별화된 서비스를 자국민에게 제공하는 모습을 부러워했었다.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발전해 여러 항공사들이 다양한 서비스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 한국의 하늘을 수놓는 여러 항공사의 비행기들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또 우리나라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주셨는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현장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한 나라의 산업이 어떻게 시작돼 어떻게 발전하는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특별한 축복이었다. 그리고 그 축복을 이렇게 글로 기록해 나눌 수 있다는 사실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