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근미] 남의 시간도 소중히 여겨야
입력 2013-04-09 20:32
집에서 혼자 작업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전화 홍수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상담원들은 ‘집 전화 받는 이들의 시간은 뺏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설사 낮에 집에서 놀고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는 전화를 받을 이유는 없다. 휴대전화로도 무례한 전화는 종일 이어진다.
초창기에는 멋모르고 대꾸를 해주었지만 요즘은 한두 마디 듣다가 말없이 끊어 버린다. 이 방법을 택하기까지 여러 사건이 있었다. “그쪽과 거래할 의향이 없으니 내 번호를 지워 달라”는 읍소도 해보았고 “그쪽 물건을 구입한 적이 있으면 고마워해야지 왜 자꾸 괴롭히느냐”며 화를 낸 일도 있다. 그래봤자 오뚝이의 정기를 받았는지 앵무새와 동맹을 맺었는지 얼마 후면 어김없이 전화를 해댄다.
그나마 재구매해 달라, 구독을 재개해 달라는 등의 요청은 참을 만하다. 며칠 전 “고객님 연령 대에 많이 발생하는 암에 대한 보험을 소개하려고…”라는 말에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미 내 신상을 파악하고 당신 나이면 암이 발생한다는 협박성 멘트를 날리는 무신경에 그저 쓴웃음만 나왔다.
전화뿐만 아니다. 매일 아침 스팸 문자와 스팸 메일 지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도를 아느냐”며 가로막는 사람과 전동차 내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 때문에 머리 아픈 적도 많다.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를 잇는 ‘시간 뺏는 사회’라는 소설이라도 써야 할 판이다.
세상의 좋지 않은 일들은 대개 남의 시간을 뺏는 데서 시작된다. 각종 범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피해자가 쌓아온 시간을 무너뜨린 죄’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논문표절, 부당한 병역면제, 부정부패에 민감한 것은 시간 들이지 않고 열매 따는 일을 잘못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요즘 대한민국이 오랜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쌓아온 걸 가로채려는 북한의 야욕 때문에 전 국민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연일 선전포고가 계속되지만 생필품 사재기 따위를 하지 않으며 쌓아온 시간을 의연하게 사수하는 중이다.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솔직히 타인이 침범하는 것 못지않게 내가 낭비하는 시간도 많다. Present는 현재 또는 선물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시간은 삶에 선물을 안길 재료이다. 무례한 상담자들 덕택에 시간을 잘 활용해 달란트 남기기에 열중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져본다.
이근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