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성태윤] 한국은행 독립성은 지켜야
입력 2013-04-09 20:02 수정 2013-04-09 20:03
‘중앙은행이 적절한 통화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선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는 명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극복 과정에서 경제이론으로 체계화됐다. 실증분석 결과를 보면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된 중앙은행을 가졌던 주요 선진국들은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국가는 계속되는 물가상승 속에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런 결과를 토대로 ‘중앙은행 독립성 이론’은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됐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인 불황이 찾아오면서 물가보다는 경기침체 우려가 커졌고, ‘중앙은행 독립성 이론’에 대한 강조가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물가상승으로 고통받던 시기에는 이자율을 높이고 통화 공급을 줄이는 것이 중요했고 자연스럽게 중앙은행 독립성이 강조됐지만 지금은 이자율을 낮추고 통화 공급을 증가시키는 것이 주요 과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은 중앙은행이 독립적이지 않아도 수행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중앙은행 독립성’은 물가상승 시기에만 국한된 논의는 아니다. 물론 물가상승 압력이 높은데 중앙은행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행정부의 경기부양 요구 속에 중앙은행이 이자율을 낮추고 통화 공급을 늘리면서 물가상승 위험성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다.
경기 상황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지고 있는 행정부 입장에서는 단기 경기부양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가상승 압력이 낮아도 중앙은행 독립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중앙은행 금리 결정은 많은 사람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흔히 중립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통화정책에 대해 살펴보자. 금리를 높이거나 낮추지 않고, 통화 공급에도 큰 변화를 주지 않아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통화정책조차 실제로는 어떤 특정 집단에게 유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기침체나 원화강세로 금리를 내려야 하는 상황인데도 이를 내리지 않는다면 실물자산을 처분해 화폐 형태로 자산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일본 금융기관에서 엔화자금을 빌려 원화자금 형태로 투자한 사람은 이득을 보게 된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물가상승 압력의 높고 낮음이나 경기부양 필요성의 유무에 상관없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다만 국민경제 입장에서 가장 이익이 되는 통화정책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경기판단 능력을 중앙은행이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결정을 소신 있게 할 수 있도록 총재의 임기를 확실히 보장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금리를 결정하는 한국은행 총재와 금융통화위원회의 결정이 항상 옳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임기는 보장되어야 한다. 중앙은행 총재가 임기에 상관없이 교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중앙은행의 정치화는 막기 어렵고, 정치적인 중앙은행은 부적절한 정책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금리를 낮추지 않는 것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지키는 이미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실제로는 금리를 낮춰야 하는 상황임에도 움직이지 않는 ‘정치적인’ 중앙은행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중앙은행 총재의 임기는 확실히 보장하되 치열한 금리 논쟁을 통해 경기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정책 결정이 가능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러한 형태의 금리 논쟁을 통한 합의 도출과 설득 작업은 중앙은행이 경기 상황을 판단하고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치열한 경제논리의 논쟁 공간은 정치적 입장과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 관여를 배제하며 오히려 장기적인 정책의 효율성을 확보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금리 논쟁이 한국은행 독립성을 훼손하거나 총재 임기에 대한 논의로 변질되어선 곤란하다.
성태윤(연세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