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여왕’ 박인비는 가족愛 합작품
입력 2013-04-08 18:05 수정 2013-04-08 22:20
할아버지는 3대가 함께 골프를 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 소원을 이뤄드리기 위해 아버지는 열 살짜리 딸에게 골프채를 안겼다. 동물을 좋아해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박인비(25). 그러나 운명처럼 다가온 골프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8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란초 미라지의 미션힐스 골프장(파72·6738야드)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인 크라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박인비는 최종합계 15언더파 273타로 유소연(23·하나금융그룹)을 4타 차로 따돌리고 2008년 US여자오픈에 이어 통산 두 번째 메이저 대회 정상에 올랐다. 통산 승수는 5승. ‘골프 여왕’으로 거듭난 그녀의 뒤에는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가족과 약혼자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타고난 골프 DNA=할아버지 박병준(81)씨는 젊은 시절부터 사업을 하며 골프를 쳤다. 아버지 박건규(52)씨도 골프광이다. 박인비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강요(?)로 골프를 시작했지만 곧 두각을 나타냈다. 골프 입문 1년 만에 전국대회를 제패한 박인비는 2001년 어머니 김성자(51)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엔 US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했고, ‘올해의 주니어 선수’에 선정되며 차세대 스타로 기대를 모았다. ‘조용한 암살자’로 불리는 박인비의 강한 체력과 평정심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심장은 퍼팅에서 빛을 발한다. 지난해 이 부문 1위로 ‘퍼팅 퀸’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박인비는 이번 대회에서도 자로 잰 듯한 ‘송곳 퍼팅’으로 우승을 낚았다.
박인비는 우승 후“오늘이 부모님께서 결혼하신 지 25주년 되는 날이라 더욱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긋지긋한 슬럼프는 박인비에게도 찾아왔다. 박인비는 첫 우승을 2008년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차지하며 일약 ‘신데렐라’로 등극했다. 한국인으로는 다섯 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이었으며, 박세리의 US여자오픈 최연소 우승 기록(만 20세)을 1개월 앞당긴 최연소 우승이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세계 정상에 선 그는 갑자기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3년 동안 우승은커녕 2011년에 기록한 공동 6위가 최고 성적이었다. “2009년이 가장 힘들었어요. 하루에도 수백 번씩 ‘골프를 그만둘까’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사랑의 힘으로 재기=흔들리던 박인비를 붙잡아준 사람은 약혼자 남기협(32)씨다. 박인비는 2011년 프로 골퍼 출신인 남씨와 약혼했다. 남씨는 박인비와 투어생활을 함께하며 코치 겸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남씨는 본인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습득한 스윙 노하우를 약혼녀에게 전수했다.
박인비는 남씨 덕분에 골프에 대한 관점도 달라졌다. 이제 박인비에게 골프는 힘든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놀이가 됐다. 지난해 2승으로 부활한 박인비는 이날 우승 후 약혼자와 함께 전통에 따라 ‘호수 세리머니’를 했다. 18번 홀 옆에 있는 호수에 뛰어들어 ‘호수의 여인’이 된 박인비는 약혼자 자랑을 잊지 않았다. “부모님이 현장에 오시지 못했는데 약혼자가 플라스틱 병에 호수의 물을 담아 부모님께 전해드리겠다고 했어요.” 둘은 올 초 메이저 대회 우승 후 결혼하자는 약속을 했다.
박인비는 이번 대회 우승으로 세계 랭킹이 4위에서 2위로, 시즌 상금 랭킹도 3위에서 2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는 외롭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메인 스폰서와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인 스폰서는 프로 골퍼들에겐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한 골프 전문가는 “후원 기업이 골퍼의 실력이 아니라 외모를 따지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후원을 받지 못하는 박인비는 ‘기부천사’다. 모교인 광운대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해마다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또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단체인 ‘메이크어위시재단’도 꾸준히 돕고 있다. 지난해엔 주니어 골퍼 육성에 써 달라며 제주도에 5000만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