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명호] 쿠바, 한반도, 용기
입력 2013-04-08 20:13
소련의 쿠바 미사일 설치로 미·소 간 핵전쟁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62년 10월 26일 오후. 백악관에서 두 블록 떨어진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의 고급 식당 옥시덴털(Occidental)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표정은 심각했다. 한 사람은 abc방송 국무부 출입기자 존 스칼리, 또 한 사람은 주미 소련대사관 고문 알렉산더 포민.
미 정부의 비밀스런 요청에 따라 스칼리는 포민을 만났다. 스칼리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딘 러스크 국무장관과 막역한 사이다. 포민은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최측근이자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미국 책임자였다(포민은 가명이며 훗날 KGB 소속 훼클리소프 대령으로 밝혀진다).
이 자리에서 스칼리는 미국의 48시간 내 쿠바 폭격 계획을 전달했다. 포민은 그럴 경우 서베를린 공습을 경고했다. 그러면서 포민은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밝히면, 쿠바에서 SS-4 SS-5 중거리 미사일 철수’를 제안한다. 3차 세계대전, 인류 역사상 핵전쟁에 가장 근접했던 위기는 이렇게 해결의 첫 단추가 꿰어졌다.
위기 타개에 필요한 비밀대화
지금도 워싱턴 정가의 고위급들이 자주 이용하는 옥시덴털 레스토랑의 한켠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진 동판이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종식시켰던 곳.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러시아의 Mr. X가 abc방송 기자 존 스칼리에게 쿠바 미사일 철수와 관련된 제안을 했다. 이 만남을 기초로 핵전쟁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비밀대화는 27일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 주미 소련대사 아나톨니 도브리닌 및 포민 간에도 이뤄졌다. 비밀대화 중에도 초강경 성명전이 이어졌고, 미국 U-2첩보기가 쿠바 상공에서 소련제 대공미사일에 격추되는 상황도 발생했다. 우여곡절 끝에 소련은 28일 쿠바 미사일 철수를 선언했다. 11월 20일 소련은 폭격기도 철수시켰고, 미국은 쿠바 해상봉쇄를 풀었다.
지난주 미국 랜드연구소의 군사전문가는 지금의 북·미 간 대립과 무력시위가 “쿠바 미사일 위기와 비슷하다”고 분석했다. 케네디의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은 정치학이나 리더십 분야에서 모범사례로 꼽힌다. 우선 국가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고 효과적인 대응방식을 택했다. 겉으로는 아주 강경하고 단호한 입장을 내보였다. 해군 함대와 전략 폭격기 배치, 유럽주둔군 경계태세 발령, 핵잠수함 전투 준비 등을 조치한다.
그러면서 케네디는 비밀대화를 통해 소련의 정확한 의중을 읽게끔 만든다. 자신의 단호한 의지도 전한다. 일종의 특사 외교이자 비밀회담이었다.
내부 강경파 설득하는 리더십
둘째는 정치지도자로서 케네디의 용기다. 쿠바 사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핵전쟁을 피한 것은 케네디와 흐루시초프가 각각 내부의 군부 강경파를 설득하는 과정이었다고도 분석한다.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케네디가 쿠바를 공습하자는 군부 매파들을 설득하고 제압하는 일이었다. 그는 군부가 제안한 군사행동 중 가장 충돌 가능성이 적은 해상봉쇄를 택한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고뇌와 번민을 했겠지만, 최소한 국민들에게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용기와 결단력이 평가되는 부분이다.
케네디는 흐루시초프가 양보한 대가로 그 다음 해 소련이 요구했던 터키 내 중장거리 미사일을 철수시킨다. 이를 계기로 핵무기 실험을 제한적으로 금지하는 SALT회담이 성사돼 미·소 간 역사적인 첫 군축회담이 시작된다.
전쟁 위기 속에서도 침착하게 비밀대화를 갖고, 정확한 의중을 전달하며, 내부 강경파를 설득하고, 국민들에게는 단호한 의지를 내보였던 정치 리더십, 지금 한반도의 대통령에게는 그런 리더십이 절실하다.
김명호 편집국 부국장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