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운식 (7) “청년들아, 세계를 만끽하라” 유레일패스 첫 도입
입력 2013-04-08 17:08
1978년은 여행업계 종사자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해다. 그해 11월 라디오 뉴스를 듣다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귀에 익은 아나운서의 목소리에서 낯선 뉴스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뉴스에 따르면 이날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김포공항으로 돌아온 여객기에서 100만번째 외국 여행객이 국내에 입국했다고 한다. 이 100만번째 입국객은 미국 캘리포니아 세크라멘토시의 한 선교단체 소속 여성 관광객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관광여행업계로서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우리나라는 당시 10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한 39번째 나라였으며 아시아 지역에서는 홍콩과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과 일본에 이어 7번째였다. 이후 여행산업은 성장세를 이어가 1988년 200만명, 1991년 300만명, 1998년 400만명, 2000년 500만명을 돌파했다. 정부도 이때부터 관광산업 육성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개정된 관광진흥법은 여행업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변경해 진입장벽을 낮추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관광산업이 청정 산업이자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임을 인식해 청와대에 관광담당 특별보좌관을 두고 관광정책을 직접 챙겼다. 경주 보문관광단지와 설악산 관광숙박단지, 제주 중문관광단지 개발이 추진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서울항공도 여행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중흥기를 맞았다. 이 시기 우리 회사의 도전적 과제는 ‘유레일패스’를 도입한 것이었다. 1970년대는 해외여행 시장이 제한적이어서 여행사 입장에서는 항공권 판매에만 열을 올렸다. 하지만 1980년대 초 해외여행이 단계적으로 자유화되면서 우리 국민들의 여행 패턴도 변화하게 됐다.
나는 이 같은 변화의 물결을 타고 학생 시장을 파고들기로 했다. 이미 서구의 많은 대학생들은 배낭여행이라는 형식의 자유여행을 통해 유럽의 거리들을 누비고 있었고, 우리나라 학생들도 곧 이 대열에 합류할 것이라는 예상에서였다.
해외여행과 외국 경험이 아직 부족했던 당시 우리 대학생들에게는 무엇보다 편리한 여행 방법이 필요했다. 대학생들의 불편을 해소키 위해 나는 1979년 유레일패스를 도입했다. 처음 유레일패스를 들여와 홍보를 시작했을 때 우리 회사는 여행업계에서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나의 예상대로 유레일패스 시장은 급성장했다. 제2, 제3의 배낭여행 시대를 맞으며 유레일패스는 매년 판매율이 급증해 1996년에는 하루 매출액이 15억원에 달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자유여행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자회사 ‘에주투어(Edu Tour)’는 이 같은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1989년 태어났다. 나는 지금도 에주투어의 설립을 내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대학생들이 선진국들을 돌아보며 진취적 기상을 품을 수 있도록 하는데 미약하나마 힘을 보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주투어는 설립 이후 유레일패스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철도 패스를 국내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왔고, 수백 차례의 ‘토요배낭여행 설명회’를 개최해 학생들의 여행 공포증을 덜어주었다고 자부한다.
솔직히 말하면 사업이 급성장하던 시기에 나는 신앙생활을 그리 열심히 하지 못했다. 아내의 전도로 1964년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일년에 절반 가까이를 해외에서 보내던 시절 내게 교회는 가깝고도 먼 존재였다. 내가 하나님이었다면 이렇게 축복했음에도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도에게 화가 났을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던 방법으로 사용하셨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