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억 받은 사람은 무죄, 준 사람은 유죄

입력 2013-04-07 18:31 수정 2013-04-07 22:55


4년 전 농협의 ‘세종증권 매각비리’ 당시 로비자금을 전달한 혐의로 징역형이 선고됐던 홍기옥(64) 전 세종증권 사장이 최근 재심을 청구했다가 기각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부장판사 김환수)는 “재심을 개시할 만한 새로운 증거가 없다”며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고 7일 밝혔다. 이에 따라 청탁대가로 50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은 모두 무죄를 받았지만 돈을 건넨 홍 전 사장만 유죄를 받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다.

홍 전 사장은 2005~2006년 ‘세종증권이 농협에 인수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당시 정대근 전 농협회장과 남경우 전 농협사료 사장에게 50억원을 건넸다. 2008년 말부터 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이름도 나왔다. 당시 홍 전 사장이 노씨에게도 30억원을 건넨 사실이 드러났고, 세종증권 매각비리 수사는 결국 노 전 대통령 수사로도 이어졌다. 홍 전 사장은 기소돼 2009년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항소를 포기해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

홍 전 사장이 뒤늦게 재심을 신청한 것은 당시 50억원을 주고받았던 나머지 인물들이 항소심에서 모두 무죄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인물은 홍 전 사장과 공모해 돈을 건넸던 김형진 전 세종캐피탈 대표와 실제로 50억원을 받은 남 전 사장, ‘자금 종착지’로 지목된 정 전 회장 등 3명이었다. 재판부는 그러나 “정 전 회장이 뇌물수수를 지시했다는 남 전 사장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유일한 직접 증거였던 남 전 사장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자 정 전 회장 혐의도 흔들렸다. 물론 50억원이 남 전 사장이 설립한 IFK㈜로 흘러들어간 사실은 명백했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검찰에 공소장 변경을 검토해보라는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피고인들은 특가법상 뇌물과 뇌물공여죄로 기소됐었다. 뇌물죄 적용대상인 공무원 신분의 정 전 회장이 무죄가 되면 나머지 피고인들을 처벌할 길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검찰은 공소장을 변경하지 않았고, 결국 정 전 회장 등은 무죄가 확정됐다.

홍 전 사장은 ‘반성의 의미’로 항소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달 15일 재심 관련 재판에서 “노건평씨 문제가 불거지고, 노 전 대통령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당시 자숙하는 의미에서 항소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홍 전 사장의 1심 재판 당시 노씨도 같은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노씨는 특가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2년6개월 형이 확정됐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