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3부)] ‘젤렌도르프 노인요양원’ 가보니…

입력 2013-04-07 17:57 수정 2013-04-07 22:49


지난 2월 8일 독일 베를린 젤렌도르프 노인요양원은 두꺼운 겉옷이 거추장스러울 만큼 따뜻했다. 밤잠을 설칠 정도로 썰렁하던 독일 호텔과 비교하면 실내 온도는 확연히 높았다. 온기는 신발 신은 발바닥으로도 전해졌다.

다나 루소 요양관리실장은 “노인들은 추위를 많이 타는 데다 사소한 감기가 폐렴 같은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난방에 신경을 많이 쓴다”며 “요양원 전체 바닥이 온돌로 돼 있다. 온돌 열기가 각 방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돼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 통역자는 “10년 넘게 독일에 살았지만 온돌이 있는 건물은 처음 봤다”며 놀랐다.

◇작은 배려가 만드는 큰 차이=게리 쿠퍼 주연의 고전영화 ‘모로코’(1930년)와 오드리 헵번·그레고리 팩 주연의 ‘로마의 휴일’(1955년), 독일 제과회사 데보이켈라어 쿠키를 먹는 빨간머리 소녀. 요양원 복도 벽에 걸린 옛 영화와 광고 포스터들이다.

방주인이 ‘잘 나가던’ 시절 찍은 사진들도 눈에 띄었다. 검은 시스루 무대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발레리나, 핀 조명을 받고 무릎을 꿇은 무대 위 연극배우. 요양원에 입주한 137명 대부분은 치매, 파킨슨병, 관절염 등 크고 작은 질환을 앓는 노인 환자들이다. 청춘에 본 영화와 광고, 젊은 시절 자신의 사진들은 기억을 잃고 거동마저 불편해진 입주자의 뇌를 자극하고, 삶에 활기를 주기 위해 요양원 측이 마련한 작은 배려였다.

50년여 전 스타 발레리나였다는 사진 속 주인공을 1층 카페에서 만났다. 차를 마시는 친구들 틈에 섞여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앉은 은발의 70대 할머니는 고갯짓으로 ‘예’ ‘아니요’ 정도 의사표시만 가능한 중증 치매환자였다. 한 간호조무사는 “할머니가 가끔 발레리나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한다”며 “사진 속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걸 알아보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루소 실장은 “돌보는 어르신이 발레리나였는지, 기계공이었는지를 아는 건 정말 중요하다”며 “추억을 일깨우는 것은 무엇이든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배려는 색깔과 배치에서도 드러났다. 각층은 분홍, 파랑, 노랑 등 벽지 색깔로 구분됐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노인들이 층을 헷갈리지 않도록 층마다 다른 색깔을 쓴 것이다. 엘리베이터 이용조차 힘든 중증 노인들을 위해 층마다 담소를 나눌 휴게공간도 넉넉히 마련했다.

◇요양원에서도 계속되는 평범한 일상=쓸개수술 후 혼자 지내기 어려워져 2010년 젤렌도르프 요양원에 입주한 볼프강 크뤼겔(81)씨. 새 입주자가 오면 요양원 투어를 해주는 걸로 유명하다. 루소 실장이 “카페에 혼자 앉아있는 걸 본 적이 없다. 늘 친구들에 둘러싸여 지낸다”고 소개할 만큼 인기 많은 입주자다.

야외 베란다로 연결되는 서너평 남짓 크뤼겔씨의 방은 요양원이라기보다는 한적한 교외 실버타운의 독실처럼 보였다. 창가에는 바흐를 좋아하는 크뤼겔씨가 가끔 연주하는 전자키보드가, 벽에는 가족들과 함께 방문했다는 이탈리아의 한 성당 달력이 걸려 있었다. 책장에는 클래식 CD와 ‘베를린의 오르간’ 같은 음악서적, 요즘 읽고 있다는 독일 역사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하루 일과를 묻자 크뤼겔씨가 “굉장히 바쁘다”며 문에 붙은 일과표를 가리켰다. 오전 5시30분 기상, 오전 8시 식사, 오전 9시 물리치료, 오전 10시 합창연습, 낮 12시 점심. 오후는 산책 및 독서, 수다 같은 자유시간으로 채워졌다. 가끔 가족, 친지들의 방문도 받는다.

크뤼겔씨가 요양원에 들어온 이유는 안전 때문이라고 했다. 딸과 아들이 베를린에 살고 있지만 혼자 지내는 그를 늘 챙길 수는 없었다. 요양원에서라면 ‘일상’과 ‘안전’이 동시에 확보됐다. 24시간 언제든 간호사를 부를 수 있도록 방안 곳곳에 비상벨과 비상전화가 놓여 있었다. 또 1주일에 2회 방문의사로부터 진찰을 받고, 매일 재활치료도 받을 수 있다.

루소 실장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66세와 74세가 된 친정 부모가 계신데 수발보험이 지급하는 수당으로 요양보호사를 고용해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100년 전에는 대가족이 함께 살며 노인과 아이를 돌봤지만 지금은 그 역할을 사회가 나눠서 해주는 거지요. 세금과 보험료를 내는 대신 사회가 나의 짐을 나눠지는 셈이에요. 덕분에 노부모를 둔 저 같은 여성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베를린=글·사진 이영미 기자

■자문해주신 분들

▲독일국민연금공단 소속 경제분석가 마르쿠스 자일러·홍보담당관 안드레아 포이저 ▲젤렌도르프 노인요양원 다나 루소 요양관리실장 ▲안트예 발트허 테카(TK) 건강정책 담당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윤석명 연금연구센터장·유근춘 연구위원 ▲이용하 국민연금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호용 건강보험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한스 브라운 독일 트리어대학 사회학과 교수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