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두 번째 결혼
입력 2013-04-05 17:41
지난주 나와 친분이 있는 한 목사님이 혼인신고를 했다. 작년 말부터 혼인신고를 하려고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지난주에야 비로소 오랜 독신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 목사님이 혼자 산 지는 이십 년이 넘는다. 첫 번째 혼인은 피치 못할 이유로 해소(解消)됐고 이후 여태껏 홀로 살아왔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쳤던 올 겨울을 지나 봄기운으로 하늘과 땅이 새로워지는 때에 결혼을 했으니, 오랜 겨울과도 같았던 그의 인생도 봄날처럼 다시금 생동하기를 기도한다.
종교개혁자 칼뱅의 결혼
1540년 8월 초순 스트라스부르에 살던 ‘이델레트 드 뷔르(Idelette de Bure)’라는 여인도 두 번 결혼을 했다. 그녀가 택했던 두 번째 남편은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뱅이었다. 이델레트의 첫 남편은 ‘장 스토르되르’라는 인물로 재세례파 지도자였던 것 같다. 이들 사이에는 아이가 둘 있었는데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개신교 도시였던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해서 살았다. 그때가 마침 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인 망명자들을 위한 교회를 맡던 즈음이었다. 프랑스 출신인 이델레트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인 칼뱅이 목회하던 교회에 출석했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추방돼 스트라스부르에 온 것은 1538년 가을이었다. 처음 몇 개월 동안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Martin Bucer)의 집에 머물렀다. 도미니코회 수도사였던 부처는 종교개혁의 대열에 합류한 이후 1521년 수녀 출신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이 시기에는 적그리스도가 타락한 수도사와 타락한 수녀 사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중세의 믿음이 아직도 살아있던 터였다. 로마 가톨릭은 종교개혁자들이 성적 쾌락을 위해 여자를 취한다고 격렬하게 조소하고 비아냥거렸다. 부처는 이런 중세적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으며 금실이 좋았던 둘 사이에는 무려 13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혼자인 데다 건강까지 좋지 않았던 칼뱅은 부처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부러워하였고 그의 권유로 결혼을 결심하고 1539년 세 차례 여자들을 소개받는다. 첫 번째 만남은 어떤 독일 귀족이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가난한 종교개혁자와 화려한 귀족의 삶은 격이 맞지 않았고 무엇보다 소개받은 여인이 프랑스어를 하지 못했기에 적당한 상대가 아니었다. 스위스 종교개혁자 파렐(Farrell)이 중매한 두 번째 여자는 연상이라는 점만을 빼놓고는 적당해 보였다. 하지만 연상이라도 너무나 연상인 것이 걸림돌이었다. 서른 한 살의 총각이 소개받은 여인은 무려 마흔 여섯 살이었다. 칭찬이 자자한 프랑스인 여인을 세 번째로 소개받았으나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540년 봄 전염병이 스트라스부르를 덮쳤다. 이델레트의 남편인 장 스토르되르도 이 전염병에 희생됐다. 이델레트의 헌신과 사랑을 지켜보았던 칼뱅의 가슴 속에는 그녀에 대한 애정이 싹터 갔다. 눈치를 챈 부처는 이델레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고 둘 사이의 관계는 빠른 속도로 진전됐다. 그해 8월 파렐의 주례로 결혼식이 열렸다. 파렐은 69세의 나이에 결혼했는데, 신부는 첫 번째 남편과 사별한 젊은 여인이었다.
1549년 이델레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칼뱅과 이델레트 사이에는 세 명의 아이가 태어났지만 모두 어릴 때 사망했다. 이들의 결혼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특히 이델레트에 대해서 ‘창녀의 과거’를 가졌다거나 부도덕한 과거 때문에 아이가 없다는 모멸적인 인신공격이 일었다. 하지만 이 당시 재세례파의 결혼관은 혼인이 당사자들 사이의 자유로운 합의에 근거한다는 고전기 로마법적 전통에 충실했고 이델레트와 칼뱅의 사랑과 애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칼뱅은 이델레트를 떠나보낸 뒤 슬픔에 잠겨 이렇게 편지를 쓴다. “나는 가난한 삶과 죽음까지도 기꺼이 나누었던 생의 최고 동반자를 떠나보냈습니다.” (김동주, ‘칼빈의 결혼과 가정에 관한 소고’, 역사신학논총 6집, 2003년, 157-175쪽 )
시민적 관점의 결혼
결혼에 비해 독신이 우월하다는 사상은 초대교회 4세기 수도자들에 의해 비롯됐다. 내가 이런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인간 본성의 억압은 또 다른 일탈의 모태인 까닭이다. 이후 중세 로마 천주교는 거룩한 혼인을 해소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결혼을 성례전으로 만든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부인들은 독신을 찬양하고 결혼을 성례전으로 보는 중세적 억압에 반기를 들고 ‘과감하게’ 혼인하면서, 혼인을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시민적 관점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두 번째 결혼의 배우자로 칼뱅을 택했던 이델레트는 혼인을 당사자 간의 자유로운 합의로 보는 로마법적 전통의 기반에서 결단했다. 당사자 간의 자유로운 합의로 혼인이 성립된다는 가르침은 너무나 단순해 오늘날은 당연시되지만, 500년 전 서양에서는 신학적 반성과 지난한 종교적 투쟁을 통해서 되찾은 인간의 기본권이었던 것이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