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교회가 있었네-보성교회] “교회 새벽종, 잠자는 믿음까지 깨웠으면 좋겠어”
입력 2013-04-05 17:41 수정 2013-04-05 21:56
경북 예천군 보문면 보성교회
보성교회는 경북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에 있다. 내성천이 눈썹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어 눈썹 미(眉)에 호수 호(湖)를 쓴 미호리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전해진다. 주민들은 이 마을을 ‘미흘’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예전부터 농토가 귀해 “부지런히 개간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할 만큼 척박한 곳이다. 땅이 있는 주민도 대부분 60대 이상의 고령이라 일손이 부족하다. 2009년 마을에서 2㎞쯤 떨어진 곳에 골프장이 문을 열었지만 경제적으로 마을에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동·서 마을을 잇는 교회
마을 주민 100여명 대부분은 유교를 받들었고 사찰의 영향력도 컸다. 마을 옆에 있는 사찰에 문중의 어르신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큰 제사를 지낼 정도다. 주민들은 논농사를 짓거나 고구마 참깨 콩 등을 재배한다. 대농은 거의 없고 먹을 만큼만 논밭을 일군다. 지난달 28일 만난 윤인희(74) 집사는 “높은 산이 없어서 충분히 햇볕을 받고 자란 상품성 높은 작물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호리는 ‘동짝마’ ‘서짝마’로 나눠졌다. 지리적으로는 연결돼 있지만 동쪽, 서쪽 마을에 예천 윤씨, 김해 김씨의 집성촌이 각각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집성촌이 생긴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시대에 유배된 선비들이 정착한 곳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한 주민은 “윤씨가 먼저 자리를 잡았고 나중에 김씨가 들어왔다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하지 않다”며 “탁주 한 잔 마시다가 담배 한 대꼬바리(담뱃대)에 농사지을 땅을 주고받던 시절보다 훨씬 전 얘기”라며 웃음을 지었다.
보성교회는 동·서 마을의 중간에 있다. 성도 대부분은 동쪽 마을 사람들이다. 오래 전부터 서쪽 주민들은 교회에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서쪽 주민이 간혹 예배당에 나오긴 하지만 설교를 듣고 난 뒤 “아유 강연을 참 잘하시네”라면서 집에 돌아가면 그만이다. 권용숙(57·여) 목사는 “동쪽마을은 전체 20가구 중 10여 가구의 어르신들이 교회에 나오실 정도로 호응이 좋은데 서쪽은 전도가 쉽지 않다”고 했다.
교회 절기를 맞아 교회 앞마당에 잔치가 열리면 서쪽 주민 여럿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때뿐이다. 한 성도는 “교회에서 무슨 행사를 하면 서짝마 어른들이 교회에 부조하는 걸로 생각해서 나오기는 하신다”며 “지금까지도 씨족 관념이 확실하고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시는 점잖은 분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얼마 안 되는 서쪽마을 성도 중에서도 김규정(70) 장로는 교회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보였다. 밭일을 하던 김 장로는 “잠시 들러 교회 역사를 설명해 달라”는 권 목사의 전화를 받고 흙이 묻은 체육복을 입은 채로 부리나케 교회로 나왔다. 김 장로는 “이 마을에서 내가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교회 역사는 가장 잘 알고 있다”면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초창기 보성교회의 모습과 성도들의 삶, 미자립교회의 어려움을 설명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6·25동란이 일어난 뒤 김차현 권사님이 이 마을로 오셨어. 그 남편 분이 경찰이라 전근을 오신 건데 김 권사님은 그때 집사님도 아니랬어. 가족들이 교회를 다녔는데 여기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지. 그때가 아마 내가 국민학교 몇 학년 때였더라….”
10여분간 이어진 ‘교회사 브리핑’을 마무리하면서 김 장로는 “어떻게 해야 이 교회가 부흥할까”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60년이나 기다렸는데도 우리 교회는 한 번도 부흥하지 못했다”며 “나 같이 평생 농사짓는 사람이야 예수님 믿다가 부르시면 가는 거지만 우리 교회는 앞으로 성도들이 확 늘어나야 할 텐데”라고 말했다.
30여년간 교회의 새벽종을 울린 이재늠(78·여) 권사의 기도제목도 ‘보성교회의 부흥’이었다. 이 권사는 “멀리 멀리 종소리를 듣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종을 친다”고 했다.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데도 이 권사는 매일 새벽기도를 시작하기 5분 전 힘껏 밧줄을 당긴다. “새벽예배 때는 13번 정도, 주일예배를 알리는 종은 한 20번쯤 친다”고 했다. 종을 치는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해가 뜨는 시각이 달라지는 만큼 새벽예배는 봄·가을 5시, 여름 4시30분, 겨울 5시30분에 시작된다.
이 권사는 남편 김규수(78) 안수집사가 3년 전 허리를 다쳤을 때 병간호를 한다고 잠시 다른 성도에게 맡긴 때를 제외하고 종 치는 사역을 쉰 적이 없다고 했다. 매일 새벽 ‘땡그랑 땡그랑’ 귀가 따갑도록 울리는 종소리가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주민은 없다. 새벽일을 나가야 하는 주민들에게 종소리는 늘 머리맡에 두고 자는 알람시계 소리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이 권사가 종을 울리게 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이 권사는 “내가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나온 것도 아니었고 교회에 제 발로 처음 나올 때처럼 그냥 저 종이 치고 싶단 마음이 들어서 시작했는데 벌써 30년이 지났다”고 했다.
이 권사의 아버지는 1983년 세상을 뜬 이수석 장로다. 이 장로는 보성교회에서 처음으로 장로 직분을 받았다. 이 장로를 비롯해 친정은 믿음이 깊었으나 시댁 어른들은 죄다 사찰에 다녀 이 권사의 신앙생활은 순탄치 않았었다. “자꾸 핍박을 하니까 매양 새벽기도로 나왔어요. 낮에는 안 나올 때가 많았고….”
지원받는 교회에서 선교하는 교회로
보성교회는 1953년 3월 세워졌다. 미호리에서 3㎞쯤 떨어진 경북 예천군 보문면 작곡리의 보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주민들이 동네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보성교회가 생기기 전 미호리의 성도들은 내성천을 외나무다리로 건너야 하는 힘든 길을 30여분 걸어가 보문교회에서 예배들 드렸다.
초창기 보성교회는 작은 초가집이었다. 한 성도는 “운곡할매가 살던 초가집을 7000원에 사서 교회로 썼고 이후 목수와 교인 몇몇이 새로 교회를 지었다”며 “옛날에 연장도 안 좋았으니까 교회 짓는 데만 몇 달이 걸렸는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담임목회자가 없어 신학교 학생들이 한동안 예배를 인도했다. 물론 교역자가 머무를 사택도 없었다. 하루 끼니를 때우기도 어렵던 시절, 주민들은 목회자에게 사례비를 드리지는 못했지만 따뜻한 보리밥 한 공기를 나누고 임시숙소를 마련해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이후 예배당은 여름 장맛비에 무너져 84년 8월 현재의 모습으로 새로 지어졌다. 건축비가 부족해 교인들이 직접 모래를 나르고 블록을 쌓아올려 예배당을 지었다.
70년대 후반 가뜩이나 적은 교인 수는 더 줄었다.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300여명이던 주민 수는 100여명으로 급감했다. 김춘기(71·여) 집사는 “옛날에는 사탕 받아먹는 재미로 교회에 나오는 애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동네에서 애들 떠드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을에서 자동차로 20여분을 달려야 도착하는 학가산 휴양림을 찾는 발길은 꾸준히 이어지지만 교회 주변으로 인적은 뜸했다. 열악한 환경 탓인지 60년간 30여명의 교역자가 이곳을 거쳐 갔다. 2008년 1월 권 목사가 부임했을 때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르신 10여명만 예배당을 지키고 있었다. 교회 승합차도 권 목사가 부임한 뒤 처음 마련됐다. 권 목사는 “부임 첫 해에는 이런저런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도할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 스스로 일어서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다른 교회의 도움을 받는 데 익숙해진 분위기부터 바꾸기로 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는 말씀을 새기면서 교회의 자립을 비전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이를 위해 성도들은 된장을 담가 도시교회에 판매하는 일을 추진했지만 큰 열매를 맺지 못했다. 질 좋은 재료를 쓰고 정성스레 만들었지만 경험이 없다보니 판로를 개척하는 데 서툴렀다.
권 목사는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고 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는 2010년 5월 교회에 공부방을 열어 10여명의 어린이들이 쉬면서 공부하고 악기도 배울 수 있게 했다. 여름에는 도시교회와 연결해 주민들이 한방 진료를 받고 농사일을 도움 받도록 했다. 끊임없이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전하려는 권 목사의 열정 덕분인지 현재 30여명의 성도들이 보성교회를 섬기게 됐다.
그는 “교회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성도들도 모두 모범을 보이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더 깊숙이 퍼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며 “내가 가장 힘들 때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목회를 하면서 포기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권 목사는 장신대신대원을 2007년 졸업한 뒤 2009년 2월 보성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지만 경제적·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는 어려움에 빠졌을 때 경험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1997년 남편 사업이 어려워져 완전히 가세가 기울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며 “신학공부를 위한 학비도 마련하기 어려웠지만 여러 믿음의 동역자들이 도와주셨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 자리까지 이끌어 주셨다”고 말했다.
보성교회의 비전은 단순한 교회 자체의 부흥만은 아니다. 널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뜻을 담은 보성(普聲)교회의 이름처럼 먼 미래에 아프리카 어린이들까지 섬길 수 있는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하는 것.
권 목사는 “당장 현실화되기 어려운 목표로 보일 수 있지만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라는 성경말씀에서 큰 힘을 얻고 있다”며 “높은 비전을 위해 쉼 없이 기도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예천=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 보성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자동차로 출발하면 3시30분쯤 걸린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신갈JC로 이동해 영동고속도로 원주 방면으로 갈아탄다. 만종JC에서 중앙고속도로 대구 방면으로 진입해 예천IC까지 달린다. 928번 지방도로 예천 방면으로 좌회전해 1.4㎞를 이동한 뒤 호명(안동) 방면으로 좌회전해 1.2㎞를 이동한다. 이어 보문(예천) 방면으로 우회전해 보문교를 지나 미호길로 좌회전, 260m를 이동해 다시 좌회전하면 우측에 교회가 보인다.